요즘 글쓰기가 많이 어려워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금연이다. 살면서 담배를 태운 날이 담배를 태우지 않은 날보다 많아졌다. 금연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확실히 금연으로 인한 금단 증상은 적응이 안 된다. 피부에 염증 반응이 오고, 계속 체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담배 생각이 난다.
특히 글 쓰기를 하면 담배 생각이 많이 난다. 심지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흡연 욕구가 올라온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면서 금연 결심을 했는데, 막상 금연을 하니 글 쓰기가 어려워졌다.
<성공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글을 쓰면서 금연을 결심했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한 후에는 항상 나에 대한 혐오가 올라왔다. 과연 나는 A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될까? 자격을 운운하게 된다. 그렇게 자격을 따지다 보면 그 끝에는 수많은 나의 모순과 마주한다. 타인의 모순점을 알아채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은 맞지만, 정작 나는 나의 모순점을 알면서 고치지 않는 나 스스로가 역겨워졌다.
그래서 현재 나의 모순 중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흡연을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내가 나를 싫어하게 만드는 그런 일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금연과 쇼펜하우어의 철학>
금연을 하면서 삶의 관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때때로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은 방향성을 가진다. 그 방향성을 가지는 것들은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려는 속성이 있다. 내가 가장 즐겨읽는 서적의 저자인 쇼펜하우어는 그런 것들을 의지라고 표현했다. 방향을 가지려는 것도 방향을 가지지 않으려는 것도 다 의지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를 우리는 표상으로서 인식하게 된다.
방향을 가진 어떤 것들은 속도를 가지게 되고, 그 속도가 더해지면 그 어떤 것들은 계속 그 방향으로 점점 빨리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습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 습관은 의지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습관으로 불리는 표상을 통해 우리는 그 의지를 인지하게 된다.
어떤 이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염세주의 비관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책으로 접한 쇼펜하우어는 삶의 의미를 삶 자체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발견한 삶의 의미는 우리가 비관적이라고 정의하는 느낌의 표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그가 비관적인 사상을 가져서 삶을 비관적으로 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가만히 두면 기본적으로 고통스러운 쪽으로 의지가 움직이기에 그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행복)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번뇌(탐욕, 어리석음에서 오는 고통)를 극복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의 Default(기본값)는 고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지도 모른다. 혹은 인간은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처럼 기본적으로 몸을 편하게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모순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결국 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할 것이란 말이다.
금연서비스 통합정보시스템 기준 21년 금연의 6개월 성공률은 30%대이다. 10명 중 7명은 금연을 포기한다. 확실히 금연을 하는 것보다 금연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쉬운 일 그리고 어려운 일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기존의 관성대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화나는 일에 화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앞서 말한 흡연 비율처럼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화를 참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 흡연을 한다고 지인들에게 설명했다. 매일 요동치는 탐욕과 게으름 그리고 나에 대한 혐오는 나를 화나게 했다. 그런데 담배를 태우면 이상하게 화를 참는 일이 더 쉬워졌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알고 있다. 화를 참는 것을 과연 담배로 해결하는 것이 옳으냐의 문제에서 그것은 잘 못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담배에 중독이 되어 흡연을 계속하기 위해 그렇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나는 나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럴싸한 핑계를 계속 찾아왔던 것이다. 주변을 보면 비흡연자이면서도 자신의 화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많다.
확실히 속도가 붙은 습관의 방향을 바꾸는 일은 어렵다. 만약 이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일단 속도를 줄여야 한다. 속도가 줄어드는 것도 속도가 붙는 것과 원리가 비슷하다. 한번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속도를 줄이는 것이 이전 보다 더 쉬워진다. 그렇게 습관을 멈추면 이제 다른 방향으로 그 습관을 바꾸고 다시 속도를 올려 주어야 한다. 확실히 새로운 습관의 속도가 붙기 전까지는 계속 속도를 내는 것은 어렵다.
어려운 일이 쉬웠다가 다시 쉬운 일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쉬운 일은 다시 어려워진다.
흡연 글쓰기는 멈추었고, 금연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흡연에 대한 또 다른 편견>
다른 회사는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근무한 회사의 임원들 중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대부분 비흡연자였다. 물론 흡연자 중에서도 종종 화가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임원은 비흡연자의 비율이 높았다. 통계적으로 고 소득자일수록 흡연의 비율이 낮다는 결과가 있다. 평소 화를 낼 수 있기에 흡연을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가능성있는 이야기겠지만 물론 이것은 나의 추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