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상사에게 3주간 시간을 주면 개인사를 좀 정리하고 다시 출장 나오겠다고 보고를 했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변화였고, 언젠가는 찾아 올 변화였지만, 그것이 이번 출장 기간에 갑자기 발생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넘어져 수술을 받았고 현재 입원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보살피기 더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이번 사고도 이미 예측된 사고였고, 징조는 계속 있어왔다.
코로나 시기가 거의 끝나가는 22년 초 아버지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일상이 생겨났고, 평소 지병이 있으신 아버지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대부분의 활동을 그만두었다. 사실 나는 그게 이유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울증과 치매는 유전적인 영향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고립될수록 발병 활 확률이 높은 질병이기 때문이다. 22년 설날이었다. 아버지는 매년 제사마다 써오는 지방을 쓰지 못했다. 한자라면 기가 막히게 알고 계셨던 아버지였는데, 한자를 못 쓰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차례 지내는 순서도 헷갈려하셨다. 곁눈으로 배운 차례 순서를 아버지에게 알려드리며 그날의 제사는 어떻게 마무리했지만, 문득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해 아버지를 모시고 치매 안심 센터에 검사받으러 갔다. 센터에서는 아버지가 경증 치매로 의심되니 조금 더 큰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기를 권했다.
작년 초, 알츠하이머와 파킨슨 병등 우리가 치매 증상이라고 부르는 진단명이 나왔다. 진단 명을 받은 순간 치매는 더 빠르게 진행이 되는 것 같았다. 말 수가 줄어들었고, 그로 인해 평소 나에게 조언하는 횟수도 줄었다. 이제는 초등학교 수준의 수학 문제도 풀지 못하며, 자주 넘어지셨다.
예상된 일이었다. 인터넷으로 많이 검색해 봤고, 관련 글들도 많이 봤다. 온 가족이 아버지의 생활에 집중을 했다. 특히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으로 가장 많은 고통을 겪게 되셨다. 한국에 도착해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갔다. 그리고 3개월 만에 본 아버지의 얼굴에서 상실을 보았다. 하지만 당사자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변 사람만 그 상실에 대해 안타까워할 뿐이다. 아버지의 병은 경증에서 중증으로 이미 진행된 듯했다.
상실하는 사람과 상실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기억하게 된다. 말하는 방법, 움직이는 방법 등 많은 지식을 몸에 기억시키며 살아간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변화하는 모습도 기억한다. 하지만 치매는 그동안 쌓아온 기억들을 상실시킨다. 조금씩 조금씩......
기억 속 총명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없어지고 무 표정의 한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 옆에 앉아서 아버지의 눈을 바라본다. 꽤 오랜 시간 그 눈동자 안의 나를 본다. 어색함을 느낄 시간이 왔음에도 그는 전혀 어색함을 느끼 않고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본다. 문득 어떤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과거 이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 감정은 바로 후회였다.
이 일이 벌어지고 난 후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좀 더 빨리 알아차렸으면, 어땠을까?
물론 별 수 없었을 것 같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이다......' 많은 우연과 필연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겪으면서 지금의 내가 가진 마음 가짐이다. 우연과 필연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고, 그 일들은 때로는 우연으로 때로는 필연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둘 사이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내가 겪어봐야 그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결국은 결과를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이 결과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결국 내가 겪게 될 일들이다. 따라서 매번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작년 여름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비록 아버지가 이 여행을 기억하시지 못하시더라도, 나와 나의 동생들이 조금이라도 후회라는 감정을 덜어내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결국 후회라는 것은 언제나 남은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와 동생들이 10년간 모은 돈은 그렇게 우리 가족의 여행비로 사용되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여행 경비는 어찌 보면 이날을 위해 모은 돈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아버지와 나는 경상도에서 사는 여느 부자(父子)들처럼 대화가 많지 않았다. 대체로 아버지는 나에게 성과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예를 들어 학교 성적이 성과라면, 평소 성실하게 공부하는 것이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일단 나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아버지에게 혼이 난 적이 없었다. 다만 평소 학업과 상관없는 행위를 하고 있을 때 혼이 났다. 만화책을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나는 자제력이 부족한 아이였다. 그래서 사실 칭찬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딱 하나 생각나는 기억은 내가 27살에 첫 직장에 입사할 때였다. 입사 소식을 알려드린 그날 밤 아버지의 얼굴에는 꽃이 피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평소 나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록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내게 보여 주었을 것이다.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사진첩에서 엽서 하나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일 때 나에게 썼던 엽서였다. 그 엽서는 그가 해외 출장 중에 작성되었다. 엽서를 받을 당시 나는 아마 글을 읽지 못했을 것이고, 3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엽서를 읽었다. 빛바랜 엽서의 색깔이 시간의 흔적을 간직했다. 그에게 말했다. 이 엽서를 쓴 기억이 나냐고...... 그는 "기억 안 난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가만히 내 눈을 바라봤다. 그 순간 마치 35년 전에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지금 내가 딸에 대해 가지는 마음과 같다는 것이 느껴졌다. 누구나 잘하고 싶지만 처음이라서 쉽지 않은 것일 뿐이다. 지금 내 마음과 사랑도 아마 우리 딸이 언젠가 떠올릴 순간이 올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잊고 살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산다는 것은 상실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런 상실의 고통이 있기에 나는 소중하다는 의미를 자주 되새기게 된다. 가지고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른다. 상실해 보아야 내 곁의 존재 혹은 그 밖의 어떤 것 (건강, 자연, 돈 등)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중학생 때 난생처음 아버지를 따라 한 천주교 재단의 천사의 집이란 곳을 방문한 기억이 난다.
천사의 집. 내 또래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나와 다른 종류의 상실을 겪은 내 또래의 친구들을 보고 겁을 먹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 지체 장애우가 모여 살고 있는 천사의 집에서 상실을 본 후였던 것 같다. 좀 더 늦게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가는 천사의 집 친구들을 보며 타인의 상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대학 4년 동안 봉사활동을 다녔다. 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나들이를 가기도 했고,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살면서 내가 배운 어떤 지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게 된 것은 2가지였다.
첫 번째로 우리는 누구나 상실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의 상실, 신체적 상실, 정신적 상실 등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상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런 사실을 계속 생각한다면 아마 불안감으로 하루도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로 상실했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린다. 다만 어떤 계기로 인해 내가 가지고 있던 어떤 것들을 상실했음을 가끔 인지할 따름이다.
두 번째는 이 상실의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끝은 같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는 가진 것이 많고, 누군가는 적다. 건강하게 태어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혹은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관리를 하지 않아 이른 나이에 건강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건강하지 않아서 누구보다 관리를 잘해 건강을 오래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그래도 종국에는 우리 모두가 가진 것 모두를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은 온다.
그런 종국의 순간이 아버지에게 어느새 다가왔음을 느꼈다. 우리 가족은 합가를 하기로 결정했다. 2집 안이 모여 3대가 살게 되었다. 물론 나의 의견보다 아내의 의견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아내는 나의 출장기간 동안 이미 어머니와 합가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따라서 나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자잘한 일들만 처리하면 되었다. 집 내부 수리와 각종 의료 지원 도구를 설치하고 사용하지 않는 짐들을 정리했다.
하루도 쉴 수 없었던 3주간의 한국 생활이었지만, 다시 한국을 떠날 때 마음은 편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정말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살 던 3주였다. 그리고 다시 출장지로 돌아왔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며칠간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의 상실로 인해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상실 중이고, 그렇기에 더욱 지금 이 시간이 중요할 지도 모른다. 어떤 말들은 상실하기 전에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이미 상실된 후에 하는 말들은 그것이 나에게 소중했다는 깨우침과 함께 후회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