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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Jan 06. 2024

동네 뒷산의 신년 해맞이

새해가 밝았다. 무려 2024년이다. 지겨운 표현이지만 이 말 밖에 실감 나는 말을 찾지 못하겠다. "2023년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2024년이라니." 작년까지만 해도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꼭꼭 이루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다짐은 실행의 결과물이 없으면 공수표일 뿐임을 또 한 번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지난 1년간 무엇을 했나? 뭔가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어떤 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공허함과 자괴감이 들었다. 재밌는 건 뭔지 아는가. 그 공허함과 자괴감마저 이미 익숙해서, 냄새나는 반찬통 닫듯 뚜껑을 닫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연말에는 아무 감성에도 빠지지 않으려 했다. 계획을 끄적이는 나도, 다짐하는 나도 지겨웠다. 송구영신에 큰 의미 두지 않고 새해를 준비하는 거창한 계획도 쓰지 않은 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보냈다. 그런데 너무 뭐가 없어서 아쉬웠는지 남편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1월 1일 아침에 뒷산 올라가서 해돋이 볼까?"  


오?, 솔깃한데.


그러고 보니 이 동네에 산지 14년째인데 한 번도 동네에서 신년 해맞이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될 만큼 아담한 동산인데 그래도 정상에 오르면 나름 높은 곳. 집을 나서서 정상까지 갔다 오면 1시간 정도 걸리는 산책 겸 운동하기 딱 좋은 곳. 왜 그동안 이 산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은 참이었다. 눈이 많이 온 뒤이긴 하지만 날씨도 그리 춥지 않고 일출시간도 7시 50분으로 적당해서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조건이 좋았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아이들과 새해 덕담을 나누고 잠에 든 후, 남편과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나 고양이세수를 하고 모자를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계획한 대로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그래서인지 바깥공기도 더 상쾌하고 기분 좋게 느껴졌다.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를 내 준 남편이 고마웠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 산 쪽 길에 들어서니 웬걸. 꽤 많은 동네 사람들이 그 길로 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이미 익숙한 듯한 사람들도 있었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는 가족, 학생들 무리, 어르신들. 이렇게 뒷산에서 해맞이하는 사람들이 많았구나. 새로움을 느끼며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날씨가 춥지는 않았지만 올라가는 데크 계단은 표면에 얇게 살얼음이 끼어 상당히 미끄러웠다. 사람들은 모두 옆에 손잡이나 줄을 잡고 조심해서 올라갔고, 해 보러 왔다가 부상을 당하면 곤란하니 우리도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올라갔다. 사람들을 따라 살살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정상에 도달. 와우- 이미 앞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정자에도 그 앞에도, 해가 어디서 뜰지 가늠하며 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어딘가로 자리를 잡고 있는 우리의 손에 어떤 분이 먹으라며 종이컵을 건네주셨다. 뭐지? 받아보니 시루떡 한 조각이 들어있었다. 어디서 온 떡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한 분이 알려주셨다. 지역 발전협의회(이런 조직이 있는 줄 몰랐음)에서 따끈한 시루떡과 막걸리, 수정과를 준비해, 해맞이하러 온 동네 분들에게 나눠주고 있다고 말이다. 아니 올라오는 길이 그렇게 미끄러웠는데 어느 길로 어떻게 그것들을 다 가지고 오셨지? 힘드셨을 텐데 누구 하나 찡그리지 않고 웃으며 온정을 건네고 있는 모습은 참 보기 좋고 감사했다.


오늘 이 산을 올라오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풍경과 느낌, 경험이었다. 그렇게 건네받은 시루떡은 달고 구수하니 참 맛있었다. 빈 속이 조금 든든해졌다.





구름이 많아 해가 보일까 조금 걱정도 되었지만, 일출 시간이 되니 눈앞 멀리 구름 사이로 하늘이 붉어지며 주황색 계란노른자 같은 해가 머리를 내밀었다.


"오 올라온다, 올라와!"


사람들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새해 첫날의 해를 연신 담았다. 이 많은 사람들도 모두 각자 가슴에 품은 소망과 꿈이 있겠지. 뜨겁게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며 마음속 염원을 바라고 기도하겠지. 다들 그 기운을 받아 올해도 열심히 살아보자 다짐하겠지. 나도 그렇게 해야지. 어느새 동그랗게 떠오른 해를 보며 말했다.


"여보, 우리 올해도 힘내자. 파이팅 하자."





사람들 사이 생경한 풍경 속에서 새해 첫 해를 본다는 것은 재미있고 뭔가 더 희망찬 느낌을 주었다. 왜 사람이 많을 줄 알면서도 굳이 해돋이 명소를 찾아가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많으면 많을수록 그 기운도 더 크게 느껴질 테니까. 사람이 많으면 복잡한데, 복잡해도 괜찮은 날이 12월 31일과 1월 1일이 아닐지.   



해는 매일 아침 똑같이 뜨는데, 유독 1월 1일의 아침해만 이렇게 사랑을 받는다. 한 해의 시작, 새로운 출발이라는 관점에서 의미가 크기 때문이겠지만, 1월 1일의 특별함은 2일 3일 4일... 날이 지날수록 다시 평범함으로 전환된다. 마음에서 잊히고 그저 오늘도 뜨고 내일도 뜨는 별다를 것 없는 날의 반복으로 위상이 떨어지는 것이다. 오늘 이 에너지가 점점 시들어 갈거라 생각하면 아쉽고 허무해진다. 아, 격하게 이 기분과 이 텐션을 이어가고 싶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매일을 1월 1일처럼 살면 어떨까? 살아있다면 매일 뜰 태양, 매일 주어질 하루를 당연한 듯 무심하게 여기지 않고 새해 첫날처럼 감사하며 희망을 담아 살아본다면. 앞으로 365번의 1월 1일로 2024년을 채워보자. 그런 삶의 태도로 나의 날들을 가꿔보자. 이제는 그렇게 힘을 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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