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어의 연대기를 관조하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본가 베란다엔 늘 항아리 두 개가 정갈히 놓여있다. 이 항아리들은 수많은 열대어들의 삶이 꾸려지는 둥지다. 부모님께서 내가 중학생 때부터 여기서 열대어를 키우셨다. 그간 백 마리도 넘는 열대어들이 우리 집 베란다에서 태어나 아가미로 숨 쉬고, 성장하고 번식하고 그 짧은 생을 매듭지었다. 내가 열대어로서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에 열대어의 기억력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삶의 터전에 대해 기억한다면 그들은 평생을 이 작은 항아리가 세계의 전부로 굳게 믿고 살았으리라. 이러한 삶은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대로 이어지며 도돌이표, 또 처음으로 되돌아와 도돌이표를 찍어왔으리라.
열대어들이 사는 항아리들은 불투명하기에 열대어를 보기 위해서는 항아리 위에서 이들을 내려다보아야 한다. 내가 숨 쉬고 있는 공기와 열대어들이 숨 쉬고 있는 물이 평평한 얇은 막으로 맞닿아 있고, 나는 그 경계를 간신히 넘지 않은 채 이들을 관조한다. 이들을 내려다보며 이들의 삶의 연대기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나는 마치 절대자가 된 듯한 감상에 빠진다. 공기층에서 산소를 폐로 호흡하는 존재가 아무런 개입도 없이 물속에서 아가미로 물속의 산소를 빨아들이는 이들을 지긋히 내려다본다. 그들의 삶의 양상은 시야를 옮길 필요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한 눈으로 관찰 가능하다.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을 이어나간다. 먹이를 먹고, 잠을 자고, 수초 사이를 지그재그 모양의 동선으로 이동해 나간다. 아들에겐 항아리 속의 물이 이 세상의 전부이다. 그렇다면 아빠께서 주기적으로 갈아주시는 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설명하기 어려운, 주기적으로 있는 지진 같은 자연재해로 여기려나.
때로는 내 삶 또한 작은 항아리 속의 열대어와 비슷한 게 아닐까, 의문을 가진다. 다른 차원에서, 절대자는 나의 일대기를 관조한다. 음식을 먹거나 수면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 생계유지를 위해 직장에 출퇴근하는 행위, 때로는 과한 걱정에 스스로를 잠식시키는 행위를 지긋이 내려다본다. 삶에 대한 집착과 아등바등함은 절대자의 시야에서 얼마나 작은 행위일까. 그 짧은 생애 동안 자신만의 작은 우주를 전부라고 믿은 채 자신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겨보려는 노력은 얼마나 하찮을까. 태양계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부피를 차지하는 행성이며 이 중에서도 나는 지구의, 아시아의, 대한민국의 지극히 일부이다. 우주 속의 우주, 겹겹이 쌓인 세계 속에 구축해 놓은 나만의 세계는 절대자적 관점에서 얼마나 미약하고 불완전하며 희미한가.
삶에 대한 집요한 집착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으려 할 때, 가끔은 절대자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아야겠다. 작은 우주, 짧은 생애. 이 또한 유한함을 직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