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드롱 Oct 17. 2023

나는 무적의 가위손

맘에 드는 주방가위란


아이고, 얘!


엄마가 내 손목을 붙잡고 다급히 외쳤다.

다른 건 몰라도 김치는 가위로 자르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모름지기 김치는 도마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잘 드는 식칼로 한번에 자르는 것이라고. 그래야 모양도 망가지지 않고

안에 있는 탄산도 덜 빠져서 맛있다고 하셨다. 에이 뭐 어때서…. 나는 주방가위를 들고 머쓱해졌다. 격조없이 양반 밥상에 불쑥 손을 내민 아랫것이 된 듯 무안해졌다.

나는 덤벙대는 편이라 칼을 쓸 때는 늘 긴장한다. 그래서 대신 가위를 자주 소환하는 편인데, 뭔가를 계속 창작해야 하는 부엌에서 가위처럼 만만한 도구가 또 없다.



엄마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김치를 가위로 자른다. 손님맞이를 제외하고는. 어차피 부엌에서의 완벽주의를 포기했기 때문에, 정갈하게 자른 김치의 탄산량 같은 것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라면을 끓였을 때 깜박 잊고 김치를 꺼내놓지 않았다면, 불기 전에 빨리 대충 잘라 식탁에 놓는 게 낫다. 그리고 예쁘든 못났든 상관하지 않는 남편과 그냥 내가 해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 아들 둘 뿐이라 점점 대충 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엄마 말 안 듣는 나는 앞으로도 김치를 가위로 자르겠지.



나는 내 주방가위를 좋아한다. 부엌에 즐겨찾기 목록이 있다면 단연 이놈이 1등이다. 10년이 넘었지만 튼튼하고 아직 날도 쓸만해서 웬만한건 잘린다.

김치도 자르고, 라면봉지도 자르고, 북어포도 자르고, 소시지도 자르고 마른 다시마도 자르고,  집게가 안보일 땐 가위로 집어내는 신공을 발휘하기도 한다. 급할 땐 거실로 소환되어 색종이도 자르고 심할때는 택배테이프도 자른다. 남들은 기겁할 일일지 모르나 쓰고 나서 깨끗하게 씻으니까 뭐…하고 합리화한다. 다행히 내 주방가위는 온 몸이 스텐레스로 되어있어 열탕 소독이 가능하고, 날을 벌리면 척 분리되어서 보이지 않는 틈까지 세척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뭘 들이대든 재빠르고 쉽게 척척 잘라주면서 내가 원할 때는 자기 몸을 열어 한끝 찝찝함도 남기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얼마나 든든한가…그러고 보면 주방에선 가위가 남편보다 낫다.

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나는 예쁜 물건을 좋아해서 주방물품도 디자인을 많이 본다. 그러나 가위는 예외다. 애초에 커다란 X자의 칼날부터 비호감이다. 원래 있는 것에 가위를 들이대는 순간 그 형태는 거부된다. 그래서 통제, 권위, 공격성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애정은 그의 기능에 대한 신뢰다. 예쁘면 좋겠어라는 기대가 없다. 그냥 잘 씻기고 오랫동안 잘 자르면 된다. 그런데 가위는 몸에 두개의 동그라미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 몸쪽으로 뚫린 이 손잡이는 사용자를 섬세하게 배려해서 디자인되었다. 정원이나 부엌용에 비해 정교함이 필요한 미용가위나 의료용 가위는 미끄러지지 않게 구멍이 작고 칼날도 날렵하다. 야비하게 생긴 가위라는 물건도 제 주인에게는놀랍도록 섬세하고 관용적인 데가 있는 거다.



엄마!

식탁에서 아들이 나를 부른다. 오뎅이 너무 커!

그래? 나는 얼른 주방가위를 들고 간다. 샥샥 작은 입에 들어가기 좋게 오뎅을 난도질했다. 옆에 김치도 커. 그래? 김치도 잘게 자른다. 김도 잘라줄까? 응. 내친김에 생선살도 손으로 발라 접시에 놔주었다.


나름 우아하게 살던 나는 어디갔나. 교양과 격식도 좋지만 배고픈 자식이 우선이 된다. 문득 생선살을 바르는 내 손이 유난히 늙어보였다. 비록 내가 불량주부긴 해도 어영부영 결혼 10년차가 되니 손이 더 못나졌다. 원래부터도 가녀린 타입은 아니었지만 더 뭉뚝해졌다. 손이 도구인건 맞으나 더욱 연장화 되었달까.

아이를 키우면 급히 해결해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다. 하긴 하루에 내 두 손이 해내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기능적인 부분만 발달하고 미적 요소가 퇴화하는게 당연하다. 남편도 잘 못여는 뻑뻑한 뚜껑도 잘 열고, 안풀리는 비닐봉지 매듭도 잘 풀고, 착 달라붙은 스티커를 떼어내고, 각종 얼룩을 수세미로 빡빡 문질러 닦아내는 내 손은 무적의 해결사니까. 내 주방가위는 그런 내 손을 가장 가까이서 돕는 유능하고 만만한 보조다.


됐다!

아들은 만족스럽다는 듯 숟가락을 들고 냠냠 먹기 시작한다. 나는 뿌듯한 기분으로 가위를 들고 싱크대로 복귀한다.

물을 틀어 나의 충실한 시종을 헹군다.

순간, 내려치는 물살 속의 가위와 내 손이 한 몸처럼 뭉그러져 보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골다공증의 명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