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핑키한 여름날
복숭아가 하도 맛있어서 금세 다 먹어버렸다.
껍질을 벗겨 잘랐더니 흰 속살에 흠칫 놀랄 만큼 붉은 혈관 같은 무늬가 퍼져있다.
한 입 깨물면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운 살에서 싱싱한 향기의 달콤한 즙이 흘러나온다. 왜 예부터 복숭아를 에로틱함의 상징으로들 말하는지 실감했다. 순수하고 탐스러운 살은 아기의 귀여운 엉덩이, 처녀의 가슴처럼 사람의 살을 연상케 한다. 원래 이렇게 생긴 과일을 인간이 마음껏 탐한 들 누가 나무랄까. 나는 괜한 변명을 떠올리며 연신 달콤한 핑크색 과육을 먹어치웠다.
분홍색 그림을 만났다.
파스텔톤의 색감이 예쁘긴 한데, 무엇을 그린 것일까? 추상화는 아니지만 구체적 형상이라기에도 애매하다. 방처럼 보이는데, 실존하는 방이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화가의 작품, 곧 그의 마음의 눈을 통해 세상을 구경하는 거니까.
작가는 형태를 일부러 자세히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뭉개진 형태를 보고도 이곳이 실내이고, 침실임을 대략 상상할 수 있다. 벽에는 바깥 어딘가를 향해 앉은 누드화처럼 보이는 그림이 걸려있고, 휘장이 달린 침대가 있으며, 하얀 배게, 그 옆에는 테이블이 있다. 원근감이나 명암의 차이도 없다. 이 방에는 틀림없이 수많은 색들이 있었겠지만, 작가는 많은 요소들을 지우고 오직 분홍들이 풍기는 분위기에 집중했다.
사람의 뇌는, 색깔에 대한 고정관념이 꽤 있는 편이다. 하늘은 파랑, 구름은 하양, 땅은 황토색, 사과는 빨강, 사람의 피부는 살색, 뭐 이런 식으로 간단히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효용성에 입각한 뇌의 처리일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피부는 수백 개 이상의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라색, 초록색, 연두색, 회색, 갈색 등 무척 다양한 모자이크 혹은 색깔 층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피부. 그걸 우린 그냥 밝고 어두운 차이 정도의 살색으로 인식한다. 실제로 모델을 관찰하며 물감으로 똑같이 재현해보려고 하면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생명의 색깔은 놀랍도록 다채롭다.
가만, 왼쪽 테이블 위에 놓인 해골이 눈에 띈다. 처음엔 화병이려니 했는데 자세히 보니 해골이 맞다. 침실에 백골이라니. 살을 부대끼고 잠을 자고 깨어나는 본능의 장소인 침실. 작가는 화사하고 따뜻한 침실 풍경에 숨은 이중성을 포착한 것일까?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죽음을 함께 암시한 것일까? 예쁘고 여성스러워 보이는 이 그림이 마냥 가볍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편견이지만 나는 옛날부터 핑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놓고 여성성을 상징하는 게 싫고, 부담스러운 색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빨강과 핑크보다는 파랑과 초록을 좋아했다. 달짝지근하고 마냥 행복한, 끈끈한 사탕 같은 핑크보다 시원하고 차가운, 바깥을 향한 자유를 상상하는 편이 좋았다. 친구들이 핑크색만 보면 와아 하고 달려드는 것을 보며 마음껏 여성성을 누리는 그들이 부러운 나머지 유치하다고 생각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속으로 난 더 쿨하고 멋진 파랑 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엔 핑크가 용감하게 사용된 작품을 유심히 보게 된다.
PINK. 이 컬러가 가진 강력한 선입견의 옷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균형을 잡는가 보게된다. 꽃분홍이 싫었던 이유도 편견일 뿐이란 생각이 들자 내 시선도 조금 달라졌다.
이 그림의 구석구석을 눈여겨보며, 뜨겁고 차갑고 미지근하고 다정하면서도 냉담한 핑크들을 발견했다. 이토록 다양했던가, 분홍색들이? 촌스럽지 않다. 나아가 민트색과의 조합은 꽤나 힙해 보인다.
결혼 후 남몰래 가진 지속적인 내 욕망은 이거였다.
어디론가 떠나서 마음껏 숨 쉬기.
행복한데, 딱히 누가 숨도 못 쉬게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틈만 나면 아무도 없는 데로 순간이동하는 상상을 하는 거다.
가족이라는, 모세혈관으로 촘촘하게 둘러싸인 지금의 내 살, 아니 내 삶은, 색깔로 표현하면 핑크일까. 핑크는표면일 뿐 그 아래는 검붉은 빨강일지도.
가정이란, 집이란, 처절하게 사랑을 갈구하고 주고 또 받는 핏줄이자 심장이다. 삶과 죽음의 현장이다. 본능이 노출되는 안식처이거나 그게 아닐 땐 전쟁터다.
사랑받고 사랑하지만 고독이 그리워, 그래서 나도 모르게 푸르고 텅 빈 공간을 꿈꾸었다. 내가 그림을 그렸다면, 새파란 새벽 같은 허공을 수 백 장 그려댔을지도.
그림을 보며 싱싱하고 뜨끈하고 비릿한 삶의 핑크를 한참 음미했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그림이 말했다.
인간끼리의 부대낌도 결국 한 계절에 불과하다고.
뜨거운 여름에만 나오는 싱싱한 복숭아처럼.
끝없는 포옹과 사랑의 말을 갈구하는 징글징글한 서로의 존재도 제철이 있는 것이다. 끝이 있다.
가족에게 미안해진다.
냉장고의 과일칸이 비어가니 생각난 김에 복숭아를 사러 가야겠다.
이 살벌하게 뜨거운 여름이 가고 나면 분명 그리워질 테니까. 온 식구 많이 먹이고, 나도 실컷 먹어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