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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손 Apr 06. 2022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남들이 좋다던 '제주도'는 시작부터 걷어냈다.

여행말고, 진짜 살겠다고 마음먹고 보니 '있어보이는 것' 말고는 장점이 하나도 없는 제주도였다. 인터넷쇼핑몰이 아직은 주업인만큼, 택배가 비싸고 느린것도 크게 한몫했다. 낭만찾기에는 상태에 비해 너무 비싼 집값도 문제였지만 가장 싫었던 건, '중국인'이었다. 코로나덕에 많이 사라졌다지만 조금만 진정되면 다시 늘어날 일이었다. 제주에 오래 있지 않았지만 바로 알게되었다. 이 도시에 살면 -물론, 모든 중국인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예의없고 질서없는 대륙의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입으며 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통영은 생각보다 더 관광지였다.

최근 5년간 방문횟수로만 치면 통영이 압도적인 1위였다. 다섯시 쯤 대전을 출발하면 저녁먹기엔 늦고, 술먹기에는 이른 시간에 도착하는 거리였다. 한 병씩 추가할 때 마다 안주가 추가되는 다찌집에서 배가 찢어질 때 까지 소주를 때려먹고, 점심 쯤 시체처럼 일어나 동피랑에서 커피마시고 중앙시장에서 회를 포장해서 돌아오는게 코스였다. 그래서였을까, 평일 낮에 맨정신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 격차가 조금 있었다. 바다는 아름답고 시장은 활기찼지만 그뿐이었다. 여행이라면 또 올 것 같긴 한데, 살고싶지는 않았다. 마땅한 집이 없었기도 했거니와 생각만큼 조용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시끄러움을 감수할만큼 다른 이점이 있지도 않았고.


사실. 나중에 미련이 남을까봐 다른 후보들을 한 두 번씩 방문해 보았을 뿐, 마음속으로는 동해안이라고 정해놓고 있었다. 기왕 동해로 갈거라면 강원도가 좋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묵호에 살고싶었다. 사람들이 많이 알고있는 강릉이나 속초가 아닌 동해였다. 친구나 가족이 살고있거나, 먹고살만한 뾰족한 방법이 있지도 않았다. 나이먹으면 동해에 한번쯤 살겠다고 생각했던 '감성적인' 바람을 미리 당겨쓰기로 마음먹었을 뿐, 현실적인 대책같은게 있을리없었다.


처음 동해에 왔던 건, 대학 3학년 여름방학때 쯤이었다.

오토바이 뒤에 텐트와 코펠을 고무줄로 묶어매고, 젖은 반바지와 슬리퍼를 말리며 상 거지꼴을 하고선 친구와 전국일주를 하고있었다. 더우면 물 찾아 웃통벗고 들어가고, 어두워지면 아무데서나 텐트치고 잠을자며 아침부터 해 질때 까지 오토바이를 달리는 일을 날짜도 잊어버릴만큼 꽤 오래 하고있던 중이었다. 

고성을 찍고, 속초와 강릉을 지나 동해를 지나려는데 마치 계획한 듯 비가 내렸다. 가뜩이나 거대한 레미콘트럭들 사이에서 태백산맥을 달려야 하는 영동지방이었다. 맑은날에도 몇 번씩 주마등이 왔다갔다 했는데, 바닥까지 비에 젖으며 죽기 딱 좋은 조건이 완성되었다.


금방 그칠 것 같았던 비는 이틀이나 계속되었다. 찜질방에만 있기도 답답하니 관광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망상해수욕장을 찍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별 기대없이 묵호항에 들렀다. 해 질 무렵 올라간 묵호항 뒤쪽 언덕에서, 남은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꾼 순간을 맞이했다. 정확히 어디였는지, 몇시 쯤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의 공기와 눈앞에 보였던 장면은 아주 선명히 남아있다. 

푸른 산에 걸쳐있는 흰색의 낮은 집들과 멀리보이는 검정에 가까운 진한 남색의 항구. 하루종일 내리던 비가 잠깐 개인 여름 강원도의 청량함과 오페라핑크와 울트라마린이 섞여 본 적 없이 황홀한 그라데이션의 해질녘 하늘 빛. 그 장면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모든게 허무해졌다. 그림은 그려서 무엇하고, 사진은 찍어서 무엇하나. 심지어 디자인이라니. '말도안되는 꿈을 꾸고 살았구나.' 라고 처음, 그리고 깊게 생각했다.


그때부터였다. 정확히 그날 그 장면 이후였다. 지금의 나로 살게 된 기준점이.

배운게 도둑질이니, 그림을 그리던 글을 쓰건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로 밥벌이를 하고살아야 하는건 당장에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배운 도둑질로 남들이 좋다는거 말고, 내가 정말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남들보다 덜 벌며 살아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인간으로 살기로 했다. 실제로 그해 겨울에 휴학계를 내고 공사판에서 몸을 굴린 돈으로 첫 창업을 해서 지금까지 비슷한 인간으로 살고 있으니, 나름 스물넷에 묵호에서 했던 다짐을 잘 지키며 살고있는 중이다.


오래 고민해봤자 엄청난 대안이 생각나지 않을 종류의 일이니, 그냥 마음가는대로 하기로 했다. 물론 이렇게 이른나이에 갈 계획은 아니었지만, 조금 미리 시작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언제 저질러도 한 번은 일어나게 될 일이니까. 스물 넷에서 서른 여섯이 되는 사이에, 휴학계 한번 내면서도 인생이 망가지는게 아닐까 벌벌 떨던 멍청이가 '고작' 바다보러 동해로 이사를 가는 '진짜' 아저씨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알듯 모를듯한 뿌듯함마져 느껴졌다.


동해에 살기로 했다. 물론 스물넷의 나와 만나고 싶은 그리움때문은 아니다. 그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더 젊고 더 열정적이었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마음은 전혀 없다. 다만 너무 지쳐있는 나의 지금을 큰 상처없이 잘 넘길 수 있게 도와주기를. 묵호가 스물넷의 나에게 선물했듯, 다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기를. 그 거대하고 검푸른 물에게 부탁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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