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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ul 17. 2024

안녕하지 않은 '안녕의 발견'

<안녕의 발견> (김종광. 2024, 마이디어북스) 서평

      


흔히 고향(시골)으로 환원되는 지방(중앙 중심적 관점임을 알면서도 이를 대체할 적절한 말이 없어 쓰니 양해를 바란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6시 내 고향’ 수준이 최대치일 것이다. 보통은 어디에 가면 뭐가 맛있고 어느 장소가 사진 찍기 좋은 핫 스팟이라는 정도의 정보로 저장되어 있을 뿐,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김종광의 소설 <안녕의 발견>은 ‘6시 내 고향’으로 낭만화되거나 대상화된 지방(시골)은 당신들이 바라보고 싶은 관념일뿐, 실은 선과 악과 위기로 점철된 삶이 드글드글한 곳임을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욕쟁이 여성 노인들의 기싸움으로 시작한 소설은 진도를 빨리 뺀다. 유창한 충청도 방언이 대대적으로 나오는데, 이를 마치 성우가 된 것처럼 따라 읽게 될 만큼 가독성이 높다. 무엇보다 익살과 해학의 순도가 높아도 너무 높아 곳곳에서 폭소를 터뜨리느라 정신을 팔다 읽은 곳을 놓치기 일쑤다. 집에서 읽었으니 망정이지 공공장소에서 봤으면 민망한 상황이 벌어졌을 판이다. 한밤중에 읽다 웃음보가 터져 가뜩이나 깃들지 않는 잠이 멀리 달아나 버린다는 게 이 소설의 유일한 단점이겠다.    

  


소설은 충청도 안녕시의 역경리하는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리 단위의 지방 마을이 그렇듯이 이곳도 고령화로 “고려장 파티”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급격히 노화된 마을에 그나마 피가 돌게 하는 사람은 아직 몸을 움직여 농사지을 수 있는 노인들(대부분 여성 노인들)과 ‘베트남 댁’이라 불리는 결혼 이주여성들과 이들이 낳은 자식들이다.      


베트남에서 시집온 베트남 댁 뚜엔은 이곳 노인들이 믿어 마지않는 ‘마을 며느리’다. 마을 사람들은 “한국 여자보다 나아. 같이 오 분만 있어도 딸같이 편할 거야”라며 칭송한다. 한국 여자보다 낫다는 말엔 ‘농촌 총각’에게 시집오지 않는 한국 여성들을 힐난하는 동시에 딸같이 살갑게 굴어야만 그나마 대접받는 외국인 며느리의 돌봄 성 역할을 확인시킨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외국인이 뭔 잘못 있어? 나라 못 만나 부모 잘못 만나 양공주처럼 팔려 온 죄밖에 없지”라며 꽤나 뚜엔의 입장을 이해하는 척하지만, 뚜엔이 팔려 왔다면 마을이 인신매매장이 된다는 것을 알고나 떠드는지, 음으로 양으로 애용하면서 사람 좋은 그를 ‘양공주’에 빗댈 만큼 그악스럽다.    

 

뚜엔은 아내 폭력범인 그의 남편이 때리면서 부끄럽게 깨달았듯 “훌륭한” 여자다. 외국인 결혼 이주여성들이 돈에 팔려오다시피 하고 아버지 같은 남자에게 맞아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저개발 국가의 자본이 없는 여성에겐 결혼 이주가 가난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선택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금전 거래로 결혼했더라도 자기가 한 선택에 상당한 책임을 지며 살아간다.   

   


결혼 이주여성을 다룬 한 기사에서 본 기억인데, 기자가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는 한 이주여성에게 그 이유를 묻자 “남편과 싸우려고요”라고 대답했다. 결혼이 여남의 끊임없는 협상의 과정임을 그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이들은 그냥 팔려온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잘 살기 위해 온 것이고, 소수자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 무기인지도 알고 있다. 뚜엔도 그렇다. 마을 사람들과 유대를 잘 유지하며 모두를 자기편으로 만들어간다. 지방의 한 작은 마을이 마을이 그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     


뚜엔은 아이가 셋인데, 그중 막내 안다수는 11살이다. 어느 날 마을 노인 7인은 유사한 예지몽을 꾼다. 그 내용인즉슨 ‘어린애를 지켜라’는 계시였다. 예견되었듯이 역경리 유일 어린이 안다수에게 닥친 일촉즉발의 위기를 마을 노인들이 힘을 합해 구해낸다. 발로는 정의감보다 공동체의 보존이었다.      


마을의 유일한 아이가 뚜엔의 아이라는 것은, 과거라면 “튀기”(혼혈아의 멸칭)라고 손가락질했겠지만, 이젠 꼭 지켜야 하는 귀하디 귀한 마을 유일의 보물로 탈바꿈하였음을 적시한다. 마을에 깃든 모든 신이 마을 노인들에게 아이를 지키라 엄명을 내린 것은, 이제 마을을 지키고 계승할 수호자가 더는 순 혈통이 아니며, 순 혈통이 아니어도 귀하다는 각성을 일으키며, 마을 보존 설화의 주인공이 ‘다문화’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독자의 배꼽을 뽑아내며 정신없이 화기애애하던 마을 이야기가 점차 간담이 서늘해지더니 마침내 역경리 ‘악귀’의 출현과 함께 공포물로 화한다. 마치 지방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았냐며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며 정신 차리라고 을러대는 형상이다.      


역경리 ‘악귀’ 강수는 싹수가 노란 강력범으로 이렇게 되기까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악질이다.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은 남녀노소를 가리는 법이 없는데, 그 기저에는 역경리 요양보호사로 “좆나게 미투 당한” 엄마의 “복수”를 대리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용인할 수 없지만, 상대하기도 무서운 까닭에 강수는 건드리면 동티나는 역경리의 ‘악귀’인 것이다.  

    

강수 ‘악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역경중학교 최고 미인이었던 14회 동창생 빛나가 “학교 동창 새끼가 나를 죽였다”고 적은 유서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동창 새끼’에 해당하는 남자 동창생들이 ‘나는 아니다’라며 구구절절 빛나를 욕망하고 모욕한 알리바이는 사악하기 그지없다.      


IMF로 낙향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잔류한 일명 ‘향토맨’들은 한때 ‘계백장군’이 되겠다는 기백을 엿 바꿔 먹고 동창생 빛나를 자살녀로 몰아가기 바쁘다. 저마다의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 빛나의 죽음이 자살이어야 하는 향토 ‘악귀들’이라니...    

 


악귀들이 창궐해도 당장 수확하지 않으면 몽땅 썩어버릴 농작물만큼 무서운 것이 있으랴. 역경리 이장 덕순은 귀한 일손인 외국인 노동자가 코로나로 수급이 되지 않자, 마을 출신 대학생 호태에게 SOS를 치기에 이른다.      


오기만 하면 후한 하루 일당은 물론 숙식 제공, 참 두 번, 야식 한 번에 인당 백만 원을 챙겨준다는 제안에 시골이 싫기도 무섭기도 했던 청년 6인방이 오기는 온다. 수확이 급한 농사일에 투입된 한 청년이 “미디어에 나오는 농촌은 조작된 농촌이다. 도시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줄 뿐이다”라고 깨닫는데, 이것이 어디 청년만의 것이겠는가.      


해서 소설을 마치고 나면, 지방을 시골로 낭만화하던 달달한 감정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기획된 무지인지와, 서울만이 살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방을 아름다워야 할 대상으로 남겨 두려 했던 도시인들의 낭만이라는 것이 실은, 언제건 쓰레기가 되어 돌아가도 재활용된다고 믿은 몰락한 식민지로서의 지방을 은폐해왔던 폭력적 망상이었음이 폭로된다. ‘안녕의 발견’은 이렇게 무참한 것이었다. 결코 안녕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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