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언덕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 (C.팸 장, 2024, 민음사)
<마이너 필링즈>를 쓴 한국계 미국인 캐시 박 홍은 소수 인종으로서 겪는 불쾌하고 부정적인 인종화된 감정을 ‘마이너 필링즈’라 표현했다. ‘Black Lives Matter’가 웅변하듯 미국에서 가장 억압받는 인종으로 흑인이 꼽히지만, 캐시 박 홍은 오히려 “아시아인은 진정한 소수자로 간주될 만한 존재감조차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다... 너무나 탈인종적이어서 실리콘 같은 존재다”라고 일갈했다.
미국인의 이주민 혐오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배 메이플라워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간 영국 청교도들은 이주민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애초 아메리카가 백인들의 땅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승선한 사람들의 거의 절반이 죽은 배에서 내린 청교도들에게 혹독한 겨울을 날 수 있는 음식과 생존법을 가르쳐 준 원주민들에게 그들이 갚은 것은 우정이 아니라 배신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치 원주민인 양 행세하며, 이주민이었던 역사를 깨끗이 지우고 현 이주민들에게 이토록 사납다.
백인은 점령지를 자신들의 땅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물자뿐 아니라 인력이 필요했다. 납치한 아프리카 흑인들을 짐짝처럼 배에 실어와 자기들의 필요에 언제든 부응할 수 있는 노예로 만들었다. 흑인 대통령이 나온 마당에도 흑인 인권침해는 여전하지만, 가시화는 되어있다. 반면 소수 인종으로 아시아인들이 겪는 참담함은 가시화조차 되어있지 않다. 수많은 아시아 혐오 범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지만 거의 보도조차 되지 않는 실상이 그 방증일 것이다.
비가시화된 역사 한복판에 대륙횡단철도를 놓느라 희생당한 수천 명의 중국인 노동자가 있다. 남북전쟁 후 흑인 노예를 대체할 저임금의 막노동꾼으로 중국인이 고용되었다. 수만 명의 중국인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미국에 발을 디뎠다. 바다 건너 생판 낯선 곳으로 이주하는 사람의 속 사정은 대개 비슷하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다, 잘 살고 싶어서다. C. 팸 장의 소설 <그 언덕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는 이렇게 미국 땅에 도착했던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독창적이다. 중국인들의 이주와 노동 그리고 그들이 당한 비인간적인 대접과 폭력을 대하소설처럼 다루지 않는다. 이주의 역사가 시작됐을 1862년을 ‘XX62’로 암호화해 단지 연대적 사실로만 기록함으로써 역사가 누락시킬 사람들과 삶을 부활시키고, 동시에, 세계 어디에서건 벌어졌거나 벌어질 폭력의 시공간적 개연성을 열어놓는다. 또한 흔히 남성으로만 상징되는 이주 노동사에 ‘아이, 여자’라는 소수자성을 돌출시켜 상상의 영역에조차 없던 아이와 여자들의 디아스포라를 미국 중국인 이주 역사에 단단히 새겨 넣는다.
마치 시조의 설화를 작성하듯, 작가는 각각의 등장인물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그 꿈틀거림은 비인간으로 간주되는 인종의 그늘에서, 근원을 알기 어려운 슬픔과 고난의 중압감과 언제든 들이닥칠 린치의 공포와 가족 이산의 두려움으로 그득하지만, 그만큼이나 살아남으려는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주인공들 마와 바 그리고 이들의 자식 샘과 루시는 잔인한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소중한 것을 버렸고 취했다.
백인의 혐오와 조롱과 탈취와 린치를 견디게 하는 것은 백인이 그다지도 숭상하는 우월감을 무화시키는 것, 목숨을 걸고 대양을 건너온 자신들에게도 이 땅의 몫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백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황금이 있는 언덕을 안다는 것. 황금은 그들 가족에게 미국 땅에 정주할 권리를 사도록 허락할까.
황금에 대한 집착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금의 실용적 쓰임이 얼마나 클까마는 모든 사람들이 강렬히 원하는 것은 보물이 된다. 골드러시는 미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도 수천 곳의 금광이 개발된 기록이 있다. 직접 금광맥을 더듬고 다녔던 채만식은 자신의 경험과 ‘황금광 시대’ 시대적 풍경을 <금의 정열>에 담았다.
1862년 황금 광산에 고용된 수많은 중국인이 미국 땅에 닿기 전, 주인공 바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상하게 생긴 아이”로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백인에게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인디언 친구와 물고기를 잡다 우연히 황금 언덕을 알게 되었다. 황금 저장소를 알면 부자가 될 수 있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다. 백인이 아니면 아는 것도 가진 것도 빼앗긴다.
바의 아내이자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마는 늙은 어부에게 시집보내지기 전 도망쳐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용감했다. 숨겨진 미모와 그보다 더 감춰진 지능을 가진 마는 낯선 땅에서 자신을 지켜줄 사람으로 바를 단박에 알아봤고 사로잡았다. 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가 가진 패를 쓸 줄 아는 여자였다. 마의 대담함과 영리함은 딸 루시에게 계승된다.
샘과 루시는 “가족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부모의 가르침을 소중히 한다. 고작 11살 12살 여자아이들은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시신을 트렁크에 담고 다닌다. 망자의 영혼이 깃들 상서로운 곳을 찾아 장례 지내기 위해서다. 호랑이와 버팔로의 영혼이 교우하는 곳에 아버지의 영혼을 풀어놓고 샘과 루시는 헤어진다. 더 남자다워진 샘과 백인 남자들의 페티시를 자극할 만큼 큰 여자 루시가 되어, 수년이 흘러 재회한다.
대단한 매력을 자아내는 샘의 ‘드랙퀸’으로서의 면모는 성별 정체성보다는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여자아이에겐 성인 남자 광부 임금의 8분의 1을 남자아이에겐 2분의 1을 주는 임금 차별에 복수한 전략이었다. 또한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에 여자보다 남자가 훨씬 유리했다. 어느덧 청년 샘은 “모험가, 카우보이, 무법자”를 꿈꾼다.
가족의 꿈을 엄마의 고향에 이식하려던 샘과 루시는 미국의 배신에 치를 떨던 엄마가 그렇게 돌아가고자 염원했던 곳으로 데려갈 배를 타기 전 다시 이산의 위기에 놓인다. 배신자에게 대가를 받으려는 백인들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마의 피를 받은 루시는 빚쟁이에게 대담한 거래를 제안한다.
애초 가족 이산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했던 루시는 부모의 딸이자 아들인 샘을 보냄으로써 가족을 지킨다. 빚쟁이의 주문대로 백인의 페티시를 충족할 여자가 되어 빚을 대속한다. 남자들이, 백인들이, 아무리 상처 주어도 루시는 상처받지 않는다. 상처는 가해자의 폭력과 수치의 증거일 뿐이다. 강하게 단단하게 살아남으라고 가르친 부모의 가르침은 실현되었다. “이 땅에서 무언가 만들어냈다”는 부모의 성취는 샘과 루시였다.
미국 역사가 사소히 다루거나 누락시킨 샘과 루시의 디아스포라 서사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황금보다 값졌다. 황금 언덕의 황홀한 서사에 다른 독자들도 매료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