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스타일치곤 결말이 훈훈했던 <미키 17>. 남편은 지루했다, 딸애는 재밌었다는데, 나는 무서웠다. 죽고 또 죽으면서 번번이 무서워하는 미키의 공포가 생생히 느껴지면서(과몰입이었나? 영화관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인간 평등의 마지막 보루인 죽는 일마저 그 권리를 박탈당한 것 같아 화가 났다. 분노의 종당은 소모품처럼 쓰고 버려진 ‘미키들’의 죽음일 것인데, 많은 죽음들이 떠오르며 비통했다.
삼성반도체 ‘황유미들’,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들’, 구의역 ‘김군들’, 콜센터 ‘소희들’, 아리셀 화재 참사 이름도 모르는 ‘이주노동자들’... 피해자들을 불러보자니 끝도 없이 줄줄이 나와 한숨이 나온다.
2021년 기준 하루 5.7명이 산업재해로 죽지만 잠깐 사망 사건으로 보도되곤 곧 잊히는 산재 사망자들. 고강도 고위험 노동을 하거나 실험실 마루타가 되어 17번이나 번번이 죽어가는 처참한 미키는, 피할 수도 있었지만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사망한 산재 노동자들의 모습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그래서 <미키 17>은 내게 SF도 환타지도 아닌 살벌한 현실물로 다가왔다.
죽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나라면 죽지 못하는 게 더 미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번번이 살고 싶어하는 미키에 나는 공감하지 못했다. 봉 감독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뻥으로 치자면 가장 최고봉일 이 한국 속담을 강하게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는 게 죽는 게 아니라서, 즉 다시 또 복제될 생명을 확신하기에 삶에 연연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17번을 참혹하게 죽고 다시 또 태어나 살고 싶다고? 죽음의 공포와 고통(얼어 죽고, 타 죽고, 마루타로 죽고 등등... )을 미치지 않고 17번이나 감당할 인류는 없다. 그래서 죽지도 못하게 Expendable(소모품) 미키를 계속 재생시켜 써먹고 버리는 저 몰염치하고 사특한 권력이 너무나 증오스러웠다.
결국 나는 이 영화를 즐기지 못했다. 한 인간의 성장물로도, 로맨스물로도, 어쨌든 정의의 승리물로도, 볼거리가 있는 우주물로도 나는 보지 못했다.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고 또또 태어나도 결국, 험하고 고되고 피곤하고 배고픈 비천한 노동계급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베넷 3D 노동자’의 운명을 피할 길 없다는 것이 무섭고 절망스러웠다. 어쩌면 가장 잊지 못할 공포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죽음도 탈취당한 인류...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