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 핸드폰은 소생하지 못하고 영영 죽어버렸다. 충전 한 방이면 해결될 줄 알았건만. 그런 나를 비웃듯 내 핸드폰은 전원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켜지지 않았고, 까만 화면은 유난히 더 까맣게 보일 뿐이었다.
가슴이 아파 자꾸 기억하기는 싫지만, 그 핸드폰에는 엄마와 나누었던 카카오톡 메시지가 남아있었다. 이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핸드폰 번호가 되어 프로필은 ‘알 수 없음’으로 뜨지만, 엄마와 나누었던 메시지 내용은 그대로였다. 그 대화가 사라졌다는 것이 가슴 저리게 슬프지만, 설령 남아있다고 해도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더 그 대화를 들춰볼지는 미지수였다. 엄마가 죽고 4년이 넘었지만 여태 딱 한 번, 그것도 올해나 되어서야 그 대화를 처음으로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웬만한 각오로는 열어볼 수 없다. 오늘 밤은 슬픔에 푹 젖어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만큼 울어보겠다 싶은 날에나 열어볼 수 있는 것이다. 살면서 몇 번이나 더 그런 다짐을 하겠는가 말이다. 슬픔에 젖을 각오를 하는 것도 시간과 체력이 모두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에게 이제는 슬퍼할 시간마저 ‘일부러 내야 하는 시간’이 된 것만 같다.
핸드폰 사진첩에 쓸데없는 사진들이 켜켜이 쌓이는 것이 찝찝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사진첩을 정리하려고 들어가 보면 평소엔 절대 들여다보지 않던 사진들이 갑자기 귀하게 느껴지는 거다. 몇 장 지우지도 못하고 다시 사진첩을 나오기를 몇 번 반복하니 어느덧 수 천장의 사진이 쌓여있었다. 그랬던 사진첩이 통째로 날아갔을 때, 나는 처음에는 속이 쓰리고 몹시도 안타까웠지만 이내 어딘가 가볍게 느껴졌다. 나아가는 내 발목을 붙잡던 잡초 혹은 미련 같은 것들이 싹 사라진 기분이었다.
내가 실제로 무언가 잃기나 했을까? 수 천장의 사진이 날아갔다 하더라도 본디 지나간 것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마와의 대화가 그랬고, 나의 세계 여행들이 그랬다. 내가 만지고, 맛보고, 껴안았던 경험만이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뿐이었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따스하고 행복했던 순간은 주로 자려고 누웠을 때 되새김질하게 된다.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모르게 스르르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내 두 발로 사막을 누볐던 기억을, 잠든 엄마를 머리카락으로 간지럽히며 장난치던 기억을 가지고 논다. 그때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보면서 추억을 끄집어내지는 않는다. 나에게 사진은 큰 힘이 없다.
새 핸드폰이 생겼다. 누구의 흔적도 없던, 그래서 한 줌의 용량만을 차지한 새 핸드폰. 왠지 그 어떤 사진도 찍고 싶지가 않아졌다. 많은 것을 찍기보단 손 끝의 촉감으로 많은 것을 기억하고 싶다. 사랑했던 기억으로 머릿속을 채우고 삶과 고뇌의 흐름을 따라 변하는 계절을 몸으로 음미하면서, 짧은 인생을 가볍게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