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유리 Jul 24. 2024

내가 울면 네가 바뀔 줄 알았지

  얼마 안 된 이야기다. 우리 반 학생 중 하나인 아이와 이었던 일이기에,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서 글을 써보려 한다.


  학기 초에는 ‘선생님께 나를 알려드려요.’의 명목으로 유인물을 하나 작성한다. 예전에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생일 때 쯤에는 부모님 두 분의 학벌과 대학교 이름, 두 분의 직업까지 적곤 했지만 요즘은 그런 건 없다. 혹여나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편견에 상처받는 아이들이 있을까 싶어 사소한 것에도 많이 신경을 쓴다. 오죽하면 ‘부모님’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고 ‘보호자’라는 단어를 쓴다. 아이들은 한 명 혹은 두 명의 보호자 이름과 나이, 그리고 ’나와의 친밀도‘를 적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보호자 칸에 두 명의 이름과 함께 ‘친함’이라고 적지만, 개중에는 한 분의 성함만 적혀 있기도 하다. 인간은 측은지심의 동물인 만큼, 그런 아이들에게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것은 사실이다. 편견이나 동정은 아니다. 애시당초 나부터가 이혼 가정에서 자랐는데, 누가 누굴 동정한단 말인가?


  부모님이 일찍이 이혼을 하시고 어머니  혼자 남매를 키우시는 한 부모 가정이 있는데, 그 집의 첫째(딸)가 우리 반이다. 시크하지만 순하고 조용한 학생인데, 근처 시장 골목에서 담배를 피다가 학교로 신고가 들어왔다. 공부랑 거리가 먼 줄은 알았지만 새벽에 돌아다니며 담배를 피는지는 몰랐다. 때마침 며칠 전이 학부모 상담이라 그 아이의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했었는데, 아이가 매일 12시 늦으면 새벽 1시에 귀가하는게 고민이라 하셨다. 스터디카페를 간다고 나가서는 10시까지 들어오라고 해도 말을 안듣고, 11시가 넘어서부터는 10분에 한 번씩 전화를 하고 카톡을 해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낮에는 일하느라, 밤에는 딸래미 기다리느라 잠도 못자는 어머니 신세가 안쓰러워 아이가 야속해졌다. 그런 어머니께 담배 소식을 전해야한다니, 전화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다.


  이후로 몇 번의 전화를 더 드려야했다. 늦잠을 자느라 학교에 오지 않는 아이 탓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면 출근길의 자동차 안에서, 혹은 직장에서 전화를 받으시느라 조용히 ‘네, 선생님.’ 하시는데, 괜히 내가 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죄송합니다.’ 하시던 어머니는 때때로 달갑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실 때도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우리 엄마도 그랬던 것 같아서, 그냥 이렇게 된 상황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좋지 않은 소식으로 학교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게 했던 나는 10년이 넘게 지나서야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중이다. 이제는 아무리 미안해도 사과조차 못하는 상황이니, 안타깝기 짝이 없어 마음은 더욱 무겁다.


  담배를 핀 아이를 앉혀놓고 상담을 하는데 우리 엄마가 생각나서 미치겠는거다. 아직도 ‘이 말을 해야만 했을까, 이게 최선이었을까’ 혼란스럽지만 감정이 북받친 나는 내 이야기를 꺼내고야 말았다. ‘일찍이 이혼을 하고 나를 혼자 키우던 엄마 속을 썩인 내가, 10년이 넘게 지나서야 미안한 마음에 아직도 속이 상한다.’하며 ‘너는 어머니한테 그런 미안한 마음 없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고 말을 하는데 눈물은 왜 자꾸 나오는지. 자꾸 목소리에서 위엄이 사라지고 눈물기 섞인 삑사리가 자리잡아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상담을 끝내고 빈 교실을 나오고부터 곧바로 지금까지 ‘아..다른건 몰라도 울지는 말걸..’ 하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아이도 내 앞에서 울기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았다가, 엎드려서 닦았다가 그러기를 반복했다. 주절주절 한 시간이 넘도록 좋게 좋게, 타이르듯 이야기를 했는데(어머니가 혼자서 너 키우느라 얼마나 힘드시겠니, 밤에 새벽에 너 걱정돼서 잠도 못 주무시고 계시는게 얼마나 피곤하시겠니, 같이 사는 가족으로서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하는 것 아니겠니, 그렇게 매일 새벽까지 돌아다니는게 얼마나 위험하고 다른 나쁜 길로 빠지기 쉬운지 아니, 등등.. ), 내 말을 얼마나 기억할런지,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할런지 잘 모르겠다.


  무슨 일이든 눈물 한 번으로 해결 되는 일은 없다. 울어서 될 거였으면 울 일도 없었다. 아이는 계속 담배를 피웠고, 새벽에 귀가했고, 학교에는 지각을 했다. 학급에도 규칙이 있는건데, 그 아이한테만 계속 ‘타이르듯’ 할 수는 없었다. 갈수록 정색을 하면서 혼내느라 울고 있던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사무치는 진심을 담아 눈물로 호소한 만큼 아이가 조금은 변할거라 생각했는데, 나의 오만이자 내 눈물을 향한 나 자신의 과대평가였다. 하기야, 철 드는 일은 누군가 죽거나 혹은 철이 들었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힘들만큼 시간이 흘러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왜인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을 정돈해본다. 몇십년이 지나건, 우리 반 땡땡이가 부디 가벼운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