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라면 정기적으로 고독을 배송받아 오로지 나 자신만을 곱씹는 밤을 가져야한다. 진정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음악도 티비 소리도 없이 바람소리 혹은 침묵과 함께, 펜과 노트가 있다면 더 좋다. 때때로 너무 많은 생각은 삶을 더 고달프게 하지만 적당한 고독과 뉘우침은 삶에 꼭 필요한 산소와 같다. 그것만이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심폐소생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꼰대가 다 되었는지 어릴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몇몇 말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다. 이를테면 혼내는 것도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 항시 잘 준비되어있던 반항심을 앞세워 어른을 대하던 중학생 시절, 나는 그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데 왜 혼내? 싫어하니까 혼내지. 다 나를 싫어해서 혼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학교의 선생님이든, 옆집 어른이든, 우리 엄마든.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얼추 세바퀴 돌아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정말이지 누군가를 나무라는 일은,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나는 엄마를 잃고 나를 혼내줄 사람도 잃었다. 못난 행동을 해도, 잘못된 선택을 해도 사랑과 진심으로 나를 혼내줄 사람을 잃었다. 이런 나에게 남겨진 삶은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밀림처럼 느껴진다. 내 앞의 덩굴이 미친듯이 빼곡해 한 발 내딛기도 힘에 부친다. 크게 소리를 질러 공중에라도 물어보고 싶다. 앞으로 내 앞에 징검다리마냥 준비되어있는 다양한 선택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며 잘못된 길로 갔을 때 누가 나를 끄집어내 줄 수 있느냐고.
옆 자리 선생님은 올 해 담임이 처음신데, 지각이 잦다. 오늘은 무려 25분을 지각했다. 9시 25분에 헐레벌떡 교무실에 들어와 노트북을 켜는데, 공교롭게도 그 선생님 반 학생 한 명이 아직도 등교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 부장님은 교사건 학생이건 일관성있게 무관심하다. 8시에 등교해서 저녁 10시까지 책을 읽거나 배드민턴을 치면서 시간을 때우며 초과근무수당을 받는 것에만 지대한 관심이 있다. 그러니 계원이 지각을 하건 말건 신경도 안쓴다. 늦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일도 없다. 물론 교사 집단은 수평적인 관료제라 부장이라는 직급이 큰 의미가 없어 누가 누구를 혼내는 일이 거의 없긴 하다. 하지만 한 집단의 어른이자 리더라면, 그리고 상대 교사가 까마득히 어린 후배 교사라면, 사랑과 진심을 담아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오늘 아침, 25분을 늦은 그 선생님이 아무렇지 않게 숨을 고르며 노트북을 켜는 모습을 보고 크게 느낀 점이 있다. 어른이 되고 나면 혼내줄 사람이 없구나, 그래서 나라도 나를 혼내야 하는구나.
정기적으로 갖는 고독의 시간에 나는 나를 혼내려고 노력한다. 과거의 나를 불러 앉혀 그 때 꼭 그렇게 말했어야 했냐고, 꼭 그런 선택을 했어야 했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다른 선택이 월등히 나았을 것이다, 하는 정답을 또렷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지, 말할 수 있었던 다른 단어들을 나열해보는 순간들이 의미가 있다. 아이때와 같이 혼내줄 사람이 있으면 마음 놓고 혼날 짓을 한 뒤 혼내줄 때 반성만 하면 간단한데, 어른은 좀 다르다. 24시간을 오롯이 스스로 돌아보고 스스로 혼내야 한다.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고, 어떤 행동이 잘 한 행동인지 판단하는 일도 내 몫이다. 역시 어른이 되는 일에는 무거운 어깨과 지친 발걸음이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