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의 일이다. 학교의 한 선생님께서 결혼을 앞두고 계셨고, 직장에 청첩장을 돌리신 날이었다. 신랑 신부의 이름 위에는 각자의 씨앗이 되어준 부와 모 이름이 적히고, 대개 부계성을 따르기에 그 자식들은 아빠와 성이 같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선생님의 청첩장은 그렇지 않았다. 딸 그러니까 신부와 아빠의 성이 달랐다. 딱 한 글자, 평소에는 이름 앞에 그림자처럼 존재하며 잘 불리지도 않는 그 한 글자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내포한다는 것을, 살아보면 안다. 눈치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열려있던 것인지 같은 교무실 선생님 중 한 분이 곧 신부가 될 분에게 물었다. 교무실엔 약 열명 내외의 선생님이 계신 상태였다.
-선생님, 근데 왜 선생님은 아버지랑 성이 달라요?
아마도 몇 초간 정적이 흐르지 않았을까 싶다. 단 일 초였다 해도 일 초는 일 분 같고 또 당사자에겐 그보다 더 길게 느껴졌을지도. 아니, 의외로 당사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레 이혼과 재혼 가정이라는 자격지심에 나 혼자 놀란 것일 수 있다.
-어머니가 재혼을 하셔서, 새아빠라 성이 달라요.
아, 그 대답을 듣기 전에도 그 선생님 입을 틀어막고 싶었는데. 대답을 듣고 나니까 더 그랬다. 무척이나 예의가 없게 느껴졌고 또 내가 다 기분이 나빴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내가 당사자도 아닌데 왜 기분이 나쁜가? 이게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교무실에 있는 사람이 10명이 됐든 20명이 됐든 이 사실을 이야기하게 된 상황에 왜 당연히 그 선생님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그 선생님께 실례되는 일이 아닐까? ‘오늘의 최고기온은 11도입니다.’ 혹은 ‘우리나라의 수도는 서울입니다.’ 같이 지나치게 객관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뿐인데 말이다.
나 참, 재혼이 어때서? 성이 좀 다르면 어때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어쩌면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재혼이 어떻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남편 이름 위에 아무런 이질감 없이 자리한 부와 모 이름이 왜인지 부럽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엄마가 죽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살아 있었더라면, 나 또한 혼주석을 어떻게 꾸릴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했을테니 말이다. 아빠의 외도와 이혼, 엄마의 재혼과 그 끝에 죽음 덕에 나의 청첩장과 결혼식, 상견례와 혼주석이 꽤나 깔끔해졌다. 하지만 당연히도, 그 모든 절차가 아무리 지저분하고 또 복잡할지라도 나는 당연히 엄마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청첩장. 그냥 형식적인 몇 자만을 끄적인 엽서 한 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딱히 숨기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널리 퍼뜨리고 싶지도 않았던 나의 인생의 굴곡까지 담겨 버렸다. 엄마 이름 앞에 붙은 국화꽃, 그 선생님의 이름 세 글자 중 딱 한 글자처럼. 누군가는 낳은 이의 얼굴도 이름도 모를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엄마도 둘 아빠도 둘일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이든 그 앞에 행복과 사랑만이 정신없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