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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Lee Dec 10. 2023

어쩌다 집짓기 - 6

1. 집 짓기의 첫 단계 토지 구입

9.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의식주. 1950년대 전후의 척박한 한국에서 삶을 살아 내야 했던 나의 부모님 세대는 안 먹고 안 입고 아끼고 아껴 허리띠를 졸라 매가며 자식들을 가르치고 키워 내야 했었다. 마찬가지로 나의 부모님도 겨울이면 창이 얇아 웃풍이 이마와 콧등을 휘감고 연탄가스가 새어 나오는 단칸방에서 우리 4남매를 키우셨다. 연탄이 거의 유일한 난방 수단이었던 그 시절에는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가는 한겨울 추위가 잦았다. 그런 날 새벽이면 연탄가스를 마셔서 정신을 잃고 엠뷸런스에 실려 갔다는 이웃의 소식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연탄가스를 약하게 마신 상태여서 정신을 완전히 잃지 않았으면 살얼음이 언 동치미 국물을 떠다 마시게 했다. 많은 집에서는 김장을 할 때마다 배추김치와 함께 동치미를 반드시 담았다. 그 시절엔 연탄가스를 마시고 정신을 잃는 일 심지어는 연탄가스로 인해 세상을 떠나는 일은 크게 놀랄 것도 없는 보통의 일상에 가까운 사고들이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들고 잘 믿어지지도 않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라테이야기이다. 70년대에 태어난 나는 다행스럽게도 먹을 것 입을 것에는 어려움이 없이 자랐다. 다만 부모에게서 독립한 이후 내 능력으로는 얻기 힘든 비싼 집 값 때문에 이사를 숱하게 다녔고 오랫동안 내 소유의 집이 없어 집주인의 갑질을 겪어야 했으며 결혼 후에는 웃풍과 곰팡이가 피는 집에 적응하면서 살았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지금의 세상에서는 웃풍, 연탄가스, 안 집... 이런 말들이 낯설기만 하다. 집주인과 안집 주인은 같은 말인듯하면서도 나에게는 전혀 다른 말이다. 어릴 적에 부모님과 이사를 밥 먹듯 하면서 다니던 시절의 또 다른 라테이야기이다. 툇마루가 있는 단칸방 하나에 흙바닥의 조그만 부엌이 딸린 집에 살았는데 안집에 흑백텔레비전이 있었다. 대여섯 살이었던 나는 오후 5시 정도에 나오던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을 정말 재미있게 봤었다. 밖에서 놀다가 해가 어스름할 무렵 ‘우~우~우~하, 우~하’하는 다큐멘터리 오프닝 음악이 나오면 안집 마루에 매달려 나무 유리창을 통해서 안집 텔레비전을 훔쳐보곤 했다. 초등 3, 4 학년 정도였던 안집 아이들은 셋집 사는 찌질이였던 내가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채널을 돌려 버리기 일쑤였다. 엄마는 안집 텔레비전을 못 보게 했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보고 싶어 져서 엄마 몰래 어떻게든 동물의 왕국을 보려고 애를 썼다. 세입자 입장이었던 나의 엄마는 내가 집주인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놀림을 당해도 단칸방에서 쫓겨 나기라도 할까 봐 말 한마디도 못하던 그런 시절의 안집. 지금은 전세 월세 살아도 집주인과 같은 공간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이런 이야기는 공감을 얻지 못하는 확연한 라테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없이 살던 시절이 나의 어린 시절 기억에 선연하게 새겨져 있다 보니 내 소유의 집을 가지는 것은 늘 절실한 숙제가 되었다.

 서론이 많이 길어졌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나의 첫 집을 짓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신중해야 했다는 이야기이다. 지어진 집을 사서 그 집에 나를 맞추어 사는 것이 아니고, 땅을 사서 텅 빈 커다란 공간에 집을 지어야 한다 생각해 보니 이거 이거 고민이 끝이 없이 이어졌다. 집의 위치 방향 크기 한여름 한겨울에 매월 들어갈 냉방 난방비... 처음 집을 짓는 나로서는 도무지 뭔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원어명 Doù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 139 ×374.7㎝ 1897년 49세의 화가 고갱이 별도의 스케치 없이 캔버스에 직접 한 달 동안 그렸다는 대작이다.

 고민하느라 밤 잠 설치던 그즈음에  눈에 들어왔던 화가 고갱의 작품. 태어나서 성장하고 화려한 삶을 살다가 늙어 죽음으로 향해 가는 인간의 생애를 그린 대작이다. 제목마저도 심오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00년 인생 길게도 느껴지지만 나의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해 보면 또 화살처럼 빠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 나이가 벌써 50이 넘었다니. 내가 나이 오십이 넘어 직접 지어서 살고 있는 집. 나는 이 집을 짓고 살면서 비로소 내 삶에 대해 깊은 명상의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무엇일까? 내가 좋아하는 것, 갖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같은 맥락으로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같은 동네 같은 형태의 집이라도 어떤 사람이 사느냐에 따라 집은 달라진다.

 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난 후에 마당에 흙과 돌을 고르면서 건강한 땀을 흘리고 꿀맛 같은 집밥을 먹는 주말이 이어지고 있다.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아닌 노동으로 가득 찬 나의 주말은 그 어디에도 비교가 불가능한 큰 행복감을 준다. 겉으로는 노동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치유 힐링의 시간이다.

주택에서의 봄은 노동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 틈날때마다 챙넓은 모자를 쓰고 마당으로 나가야 함
주말이면 쑥을 뜯어 쑥버무리, 쑥개떡을 만들어 먹고, 식목일에 심었던 나무에 밑거름을 줌

 2018년 개봉한 후시하라 켄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 후르츠’를 감명 깊게 봤다. 내 생각과 꼭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90세 건축가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와 87세 못 하는 게 없는 슈퍼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의 이야기. 건축가 슈이치 할아버지는 직접 지은 작은 집에서 히데코 할머니와 함께 수십 종의 과일나무와 채소들을 키우면서 50년이 넘도록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영화 속 할아버지는 말한다. ‘건축가들은 집을 지어 놓고 막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말로만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어떤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 가를, 어떤 공간에서 삶을 누려야 하는가를 오랜 시간에 걸쳐 살면서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설계한 뉴타운의 한구석에 300평 땅을 사서 바람이 지나가고 자연이 살아 있는 22평 작은 집을 지어 오랜 세월 직접 고쳐가며 가꾸어 간다. 산과 숲을 집안으로 작게라도 들여놓고 싶었던 슈이치 할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뉴타운은 금세 조밀한 아파트로 가득 채워지지만 노부부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간다. 차근차근 천천히 조금씩 그렇지만 꾸준하게. 영화에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는 대사가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風が吹くと落ち葉が落ちる。

落ち葉が落ちると土が肥沃になる。

土地が肥沃になると実が実る。

ゆっくりゆっくり。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

여보, 스스로 꾸준히 하는 것이야.

できることから少しずつ、

少しずつ時間を貯めてゆっくり。

あなた自ら地道にやるんだよ。     

 건축가는 집을 지어 놓고 막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는 슈이치 할아버지의 말처럼 내가 읽었던 여러 권의 건축 관련 책의 저자인 건축가나 설계사 시공사 대표님 분들은 직접 지은 주택에서 살지 않는다. 주택을 설계하고 짓고 주택에 관한 책을 썼는데 사는 건 아파트에 살아요. 이런 경우가 대부분. 영화에서도 언급되는 이야기 중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 뷔지에의 말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그렇다. 보석처럼 귀하고 보석처럼 아름다우며 소중하게 가꾸고자 하는 것이 집이다. 너무 소중하고 자랑스러워서 친구들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집이어야 한다. 요즘은 이사를 해도 집들이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 또 라테이야기이긴 하지만 내 아이가 어릴 적만 해도 집에서 백일잔치 돌잔치를 했고, 그 이전 부모님 세대에는 결혼식 장례식을 치렀던 곳도 살고 있는 집의 마당이었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말한다. ‘역시 집이 좋아’ 이런 안도감이 들어야 한다. 일상 속에 집이 굳건하게 뿌리 잡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돈을 물려줄 수는 없지만 좋은 흙을 만들어 주면 작물은 누구든 만들 수 있다. 모두가 정원을 없애버리는 요즘 같은 세대에 흙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영화 ‘인생 후르츠’를 눈물로 눈물로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지고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슈이치 할아버지의 바람은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동지를 만난 것처럼 든든했다.

가운데는 슈이치 할아버지가 집 앞에 만든 작은 숲. 맨 오른쪽 사진은 슈이치 할아버지가 300평의 땅을 사서 작은 집을 지은 모습
츠바타 할머니는 집에서 키우는 과일과 야채들로 풍성한 식탁을 만들어 내는 슈퍼우먼
출처 '인생은 아름다워' 87세 92세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부부의 주택살이

 슈이치 할아버지처럼 나도 흙과 숲이 중요했기에 집을 지을 땅을 계약할 때 지금의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집 앞이 산이어서 불편한 점은 여름에 도심보다는 모기가 많은 편이라는 점 한 가지가 있다. 그러나 좋은 점은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일단 공기가 너무 좋고 아주 조용하다. 매일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깬다. 집 앞에 산으로 올라가는 산책로가 연결되어 있어 집에서부터 신발을 벗고 맨발로 나갈 수 있다. 요즘 많이 하는 맨발 걷기를 나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사실 나는 잡초를 뽑는다든가 하는 마당일을 할 때 맨발로 일 하면 굳이 따로 맨발 걷기를 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집 앞이 산이다 보니 전망을 가리는 콘크리트 건물이 없어서 좋다. 봄에는 진달래 생강나무 산수유 꽃이 피기 시작해서 개복숭아꽃 수선화 원추리 산철쭉이 이어서 피어나고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여름 대표 꽃 수국이 고개를 내밀고, 사계절 내내 꽃과 나무들이 번갈아 가며 피어준다. 겨울이 되면 풀을 뽑는 일에서 좀 벗어나서 쉴 시간이 찾아온다. 화목난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책을 읽고 눈이 내리는 날 눈구경을 실컷 한다. 집 앞을 가리는 건물이 없다 보니 한여름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많아 에어컨을 돌리는 날은 보름이 채 되지 않는다. 겨울에는 화목난로를 매일 사용하기 때문에 난방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여름 장마에 쓰러진 나뭇가지들을 주워와서 불을 때고 그 재는 마당 한 편의 퇴비장에 과일 껍질 배추 겉잎 계란 껍데기 원두커피 찌꺼기 등과 섞어 모아둔다. 다음 해 봄에 그 흙을 뒤집어 꺼내 보면 흙냄새가 어찌나 향긋한지... 겨우내 지렁이들이 열심히 먹고 똥을 싸고 부지런히 움직여준 덕이다. 지렁이똥에서 나는 향기를 모르는 사람 없게 해 주세요~라고 소리치고 싶을 지경이다. 지렁이가 만든 그 기름진 흙을 마당에 골고루 뿌려 주면 꽃과 나무들이 그에 보답하듯 어찌나 이쁘게 피어 주는지... 인생후르츠의 슈이치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처럼 나도 후손들에게 좋은 흙을 남기는 멋진 할머니로 나이 들어가고 있는 거겠지? 하는 생각에 내 어깨를 나 스스로 쓰담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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