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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지 Jan 06. 2020

나는 곽씨보단 삼치에 가깝다

이름은 '곽민지'지만

일 끝나고 운동 가기 전에는 주로 운동 스튜디오 인근에서 혼밥을 한다. 혼자 한식 밥집 전전하길 좋아한다. 오늘은 생선구이집에 가서 삼치구이 정식을 먹었다. 한 켠에서 어르신들끼리 핏대를 세우고 토론을 하며 소주를 드시고 계셨다. 저런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언젠가부터 유튜브 알고리즘처럼, 나는 만나는 사람과 대화의 성향이 비슷해져가고 있었다. 명도와 채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그림체의 사람들과 비슷한 대화를 반복하며 산다. 혼밥을 하면, 다른 사람의 유튜브나 넷플릭스에 로그인했을 때처럼 새로운 성향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가장 핏대를 많이 세우시던, 오늘의 핏대스트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파평 윤씨, 안동 김씨 이런 거 요즘 사람들 신경 쓰는 놈이 없어. 종친모임도 늙은이들 밖에 안 와. 그러니까 아무거나 막 갖다 붙이지. 거 뭐야, 외국놈이 성씨 하나 만들었잖아. 영도 하씨? 갖다 붙이면 갑자기 성씨가 되는 거야. 제정신들이 아니야.” 


성씨는 원래 그냥 갖다 붙여서 된 게 맞는데. 그게 뭐 대단한 우주의 기원이고 필연적인 거였겠어. 파평파평 바나나로 붙였음 그게 전통으로 내려왔을지도 몰라. 할아버지와 있을 때 육성으로 대꾸했다가는 삼치로 맞았을 것 같은 말장난을 내뇌드립으로 하면서 삼치를 똑 똑 잘라 우걱우걱 입에 넣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심심해져서, 아저씨들의 대화를 계속해서 엿듣는 대신 더 쓸떼 없는 생각을 해보고 싶어졌다. 파평 윤씨가 있다고 치자. 실제로 “오늘부터 1일. 내가 바로 파평 윤씨!” 하고 선언한 아저씨가 있다고 치는 것이다. 수포자지만 산수를 해보자. 파평 윤씨가 낫(not) 파평 윤씨와 결혼한다. 파평 윤씨는 절반이 된다. 하프 파평 윤씨가 또 낫 파평 윤씨와 결혼을 하겠지? 이미 손자만 와도 파평 윤씨는 4분의 1밖에 안 된다. 증손자로 오면 10%대로 떨어진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전통이 오래된 집안일수록 근친대파티를 하지 않은 이상 그의 파평 윤씨 기질은 0에 수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영도 하씨 로버트 할리는 원 앤 온리, 100프로 순도를 자랑하는 영도 하씨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처럼 몇백 년이 지난 세상에서 내 후손과 이야기할 일이 생긴다면 “태초에 영도 하씨가 있었지. 나는 오리지날 영도 하씨를 티비에서 봤다우.” 하고 서프라이즈 제보자로 인터뷰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영도 하씨라고 하는 애들 있지? 걔네는 다 짭이란다. 실제로는 낫 영도 하씨가 그 애들 피의 대부분을 차지해.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 할미는 아담 아씨, 모계사회 기준이라면 이브 이씨란다. 한국적인 사고로 보자면 곰탱 곰씨 겸 단군 단씨지.” 


그런 맥락에서 내가 곽씨이지만 실제로는 낫곽씨 기질이 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면, 그냥 내 성씨는 내가 정해도 그만인 것이다. 뭐 롱탐 노씨 같은 것도 좋겠다. 친근하고 아련하게. 짜릿해, 늘 반가워.


농담처럼 “제사 그 까짓 거 대체 왜 지내요, 진짜로 조상들 덕 본 사람들은 다 해외 놀러나가지 제사 안 지낼걸.” 하고 투덜댔는데, 조상 덕 못 보는 이유를 알겠다. 먼 조상들 입장에서는 막상 나라는 존재에 큰 지분이 없네. 더 큰 지분이 있을 몇 대 안 된 사람들은 명절마다 왔다가 ‘뭔 상관 없는 양반들 이름으로 제살 지내고 앉았어, 기분 상해.’ 하면서 삐져갖고 돌아갔을 것이다. 결국 그냥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서 실제로 나를 이루는 본질과 상관 없는 이름으로 사는 것이다. 


문득 눈 앞에 있는 삼치는 적어도 삼치 했을 때 삼치의 특질 중 많은 부분을 상기시킬 수 있으니까, 의외로 곽민지라는 이름보다 본질을 잘 설명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마지막 조각을 먹었다. 당분간 내 몸 속에는 곽씨보다 삼치의 지분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곽씨보다야 삼치에 차라리 더 가까울지 모르는 상태로, 삼치가 준 에너지로 운동을 하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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