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딴 소리 했던 걸, 공식적으로 후회한다.
잘 다니던 좋은 회사 때려치우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삼만 번쯤 본 이 문구가 멋지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회사 다니다가 그만두고 아일랜드 더블린에 갈 때도 무슨 세상 끝에서 대단한 도전이라도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실제로 엄청나게 큰 용기를 필요로 했고, 남들 쓰는 문구를 나도 가져다가 썼다. 그리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살면서 다양한 삶들을 마주할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일부는 작가라는 삶이 선물해준 것이고 일부는 그렇게 시작된 호기심에 제 발로 노력해 만든 기회였다.
그렇게 산 시간이 회사원으로 산 시간을 넘어선 지 한참이 지났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며 느낀 점은, 저 문장은 말한 자의 자위를 제외하면 딱히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내가 대단한 도전 한 거라고 착각하고 살다가 나와보니 그런 도전을 몸에 밴 것처럼 매일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그들을 기준으로 볼 때 내가 한 도전은 딱히 도전이라 할 것도 아니고 그저 인생에서 내린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자연스럽다 함은 각자가 정한 최대 가치를 기준으로 매 순간 선택을 하는 행위가 그렇다는 의미다. 어떤 사람은 그 최대 가치가 안정적인 삶이고 어떤 사람은 나의 재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둘을 포함한 각자의 최대 가치들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 병렬로 존재할 뿐이지 어느 것이 더 옳고 의미 있는지 우열을 가릴 수도 없는 것이다.
언론에서 좋다고 말하는 직장을 다니다가 머리가 커서 신중히 고민하고 진로를 변경한 것, 혹은 아주 어릴 때 인생 경험이나 보장된 삶 없이도 처음부터 원하는 길을 가고 싶어서 뛰어든 것 중 어느 것이 낫다고 볼 수 없지만, 적어도 후자의 삶을 꿈도 못 꿔본 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저런 사람들은 저런 용기가 선천적으로 유전자에 들어있나, 저거 어떻게 하는 거지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매일 눈앞에 다가왔을 새로운 것들을 직접 뚫고 살아낸 것은 어떤 느낌일지, 나처럼 작은 세계에 살았던 사람으로서는 가늠하기 어렵고 그래서 항상 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와서, 그런 맥락에서 최근에 느끼는 것은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여행을 떠났다.’는 문장은 수많은 여행자의 용기를 서열화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정적이지 않은 직장에 다니던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데에 용기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여행을 떠나는 용기 역시 거기에 필요한 상대적 기동력을 생각한다면 상당한 무게감이 있는 것이다. 애초에 여행을 가기 전에 포기한 것의 가치에 서열을 매겨서 이어진 여행의 가치를 셈한 것인데, 그 말을 비판 없이 자신에게 썼던 나 역시 저 말을 기쁘게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저런 말이 족쇄가 되어 내 여행을 불행하게 만든 순간들이 있었다. 아, 이렇게 멋있는 짓 하는 척하면서 왔는데 왜 안 즐겁지? 이다음에 내가 아무것도 안 되어 있으면 어떡하지? 내 친구들은 나 되게 대단한 결정 한 건 줄 알 텐데, 왜 이렇게 마음이 쪼그라들고 우울할까. 나는 왜 이렇게 작을까?
덧붙여서 문장 자체가 수많은 허위로 이루어져있기도 하다. 진정한 의미로 잘 다녔으면 때려치웠을 리가 없으며, 좋은 직장의 ‘좋다’는 누구 기준으로 어떻게 측정한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겠고, 때려치웠다는 표현 역시 누가 자기 삶을 그렇게 마냥 때려치우겠는가. 브랜드명인지도 모르고 쓰는 스카치테이프나 봉고 마냥 타성에 젖어 그 말을 분해해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에 내 삶이 글러먹었다거나 사고방식이 썩어 빠졌었다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좁디좁은 내 세상의 프레임 안에서 할 수 있는 선택과 최대한의 노력은 했다. (물론 노력 안 했어도 잘못 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세상이 작아도 너무너무 작았다는 것이다. 그 작은 공간에서 주입받은 대로 세상을 바라봤고 그 틀이 가진 오류로 누군가를 상처 준 적이 있을 것이다.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여행을 떠났다는 말이 나의 소박한 시도를 포장하는 캐치프레이즈로 쓰인다면 그건 떠나는 행위마저 스펙화하는 데 기여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타인을 상처주게 된다.
여섯 살 조카 준이가 이제 나와 꽤 의사소통이 가능한 어린이로 성장하고 있다. 준이는 내 문장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내가 자주 쓰는 단어와 표현이 그 아이의 경험치가 충분하기 전까지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세계관으로 머무를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나가는 내 말들이 그래도 되는 성격의 것들인지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부터 외관상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여자 친구 있어요?’ 같은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만나는 사람 / 애인 있어요?’로 바꾸려고 한다. 혹자에게는 연인 유무를 남성에게 물을 때 ‘여자 친구’ 소리부터 듣게 되는 경험이 매일 겪는 좌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병신’ ‘암 유발’ 같은 말도 더 이상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타인을 비난할 때든 나를 향한 자조나 위트든 상관없이, 그런 단어가 통용된다는 것 자체로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내가 매일 답답하다고 외쳐대는 이 서열화되고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기여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삶의 깨달음 같은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그게 실제로 내 삶을 옥죄고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고, 관계가 깊어진다는 건 줄 수 있는 타격이 커진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가 나를 미치게 할 때 더 깊이 빡치는 건 그런 이유일 테다. 근데 최근에는 그게 꼭 관계의 깊이에서 오는 작용은 아닌 것 같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 이산화탄소와 함께 상처 줄 건덕지를 뿜어내며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마 이 글을 보고도 상처 받는 사람들이 이미 수두룩하게 나올 것이다. 쟤는 저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애가 나한테는 왜 그렇게 세심하지 않았지? 나도 쟤가 숨 쉬듯이 한 말에 상처 받았는데 하면서. (타인에게 준 상처가 1 추가되었습니...) 내년 이맘때쯤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기분을 덜 심어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게 나도 덜 상처 받는 세상에 산다는 증거가 되니까. 점점 글 쓰기가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를, 글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이 긴 글로 한 번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