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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작은

by zena

손끝이 얼고 입술이 튼다. 눈 밑에 난데없이 다래끼가 올라온다. 요란한 겨울의 시작 앞에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겨울은 오래된 것이고 나도 나대로 오래되었다. 오래된 것들을 이겨내는 방법은 견디는 것뿐이다. 견디다 보면 예상보다 빠르게 지나갈 수도 있다. 속으로 어서 가라고 빈다. 비는 일이 잦다 보니 문득 나는 나에게 왜 이리 너무하고 무정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상에 걸리고 입이 찢어지고 눈 밑이 뻘게서 사람들이 입을 대는데도 별일 아니라는 듯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척만 하니까. 사실 아프고, 아프고, 아픈데. 그가 반장갑을 사다 준다. 어느 날은 불쑥 립밤을 사다 주고 잃어버렸다고 하니 또 내민다. 뻘게진 눈 밑은 벌써 병원에 다녀왔다고 둘러대는 걸 알면서 슬쩍 넘어가 준다. 고맙다. 고맙다는 한마디면 될 걸 굳이 발라야 하나, 굳이 껴야 하나, 굳이 병원까지 가야 하나, 속으로 구시렁거릴 줄만 알고 밖으론 모른 척이다. 그러니 그에겐 어떤 마음도 전달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알뜰살뜰히 립밤을 바르고 장갑을 끼고 눈 찜질도 부지런히 하지만 이것 또한 전달되지 않을 마음이다.

하루 이틀 그리고 또 며칠이 뿌옇게 쌓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손끝에 말랑말랑한 기운이 들어차고 입술도 제법 반질반질하다. 눈 밑도 눈에 띄게 색이 옅어진다. 언제 이렇게 좋아진 걸까 싶어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렇게 며칠을 또 보낸다. 찌르르 거리는 손가락의 통증이 거의 사라지고 입술에도 손끝에도 더는 눈이 가지 않는 밤. 손끝으로 입술을 어루만지며 몸 한구석에 깊고 짙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무의미하다 여겼던 작은 행동들이 쌓이고 쌓여 의미가 만들어졌다는 쾌감과 감동 비슷한 것. 그리고 그런 마음이 이리도 쉽게 찾아온다는 것. 내 안에 쌓인 부스러기들을 말끔히 치워준 기분이다.

손과 입술 눈. 상처가 그곳에만 나 있던 건 아니다. 불안과 두려움, 슬픔이 있는 곳엔 늘 상처가 나 있었다. 걱정과 주저함, 습관처럼 가진 편견과 오만 곁에도 상처는 덧나고 있었다. 그것들이 너무 오래되어 그저 견뎌야 한다고, 그러면 사라질 거라고 묻어두기만 했는데 아니었다. 아니라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알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지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지 안에 있는 것들은 내게 더 나은 것을 만들어 주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이 곧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반 장갑을 사지 않고 립밤도 바르지 않고 병원에도 가지 않는 것보다 ‘굳이 하는 것’이 ‘고작’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았을까 몰랐을까.

작은 것과 큰 것을 쉬운 것과 어려운 것(혹은 힘든 것)으로 대치시켜 본다면 어느 것이 어렵고 어느 것이 쉬운 것일까. 모두가 다른 답을 내놓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큰 것은 애초에 작은 것이었을 테고 쉬워지기 전엔 어려움만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작은 것들을 쌓으면 어느새 큰 것이 되어있을 테고 어려움을 넘다 보면 모르는 사이 너무 쉬워져 더한 어려움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쉽고 어려운 것은 다르지만 같고 작은 것과 큰 것 또한 삶이 계속되는 한 한 덩어리가 되어 굴러올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사실 하나뿐이다. 하고 하고 하는 것.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부터라도 하는 것.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 할 수 있는 거라는 걸 아는 것. 그리고 그 아는 것을 하는 것. 하고 나면 분명 느낄 것이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행동이라도 하게 되면 어딘가에는 닿는다는 걸. 닿게 되면 커질 것이다. 커진 당신은 분명 따뜻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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