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쓰러지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것이다.
-작자 미상-
“선생님, 저 조퇴하고 싶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학생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프다고 조퇴하는 아이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조퇴 문제로 담임을 찾는다. 조퇴 사유는 단순하다. 아파서 집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아침에 조회 시간까지만 해도 웃으며 친구들하고 장난치던 모습을 봤는데 갑자기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물으면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부모님께 동의를 구하는 전화를 걸면, “네, 조퇴시켜 주세요”라고 대답한다. 학생에게 조금만 더 수업에 참여해보고 나서 그래도 못 참겠다 싶으면 조퇴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면 아이는 지금까지도 참았고 더는 힘들다며 집에 보내달라고 한다.
“선생님, 00이 하나도 안 아파요. 다음 시간이 수행평가인데 자기 준비 하나도 안 했다면서 어쩌지? 어떻게 하지? 막 이러는 거 봤어요.”
점심때 반 아이들이 내게 와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물론 나도 눈치로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아이 부모가 허락하면 보내주지 않을 수가 없다. 학생 인권 조례가 강화된 이후로 학생이나 부모가 동의한 사항에 대해 딴지를 거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허락했는데 담임이 안 보내준다고 교육청에 신고라고 했다가는 그 뒷감당을 오롯이 담임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수업 시간에 몰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학생을 지도한 적이 있었다. 그 학생을 불러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뒤 휴대전화를 압수하고 일주일 뒤에 가져가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학생의 아버지가 나에게 전화해서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수업 시간에 고작 휴대전화를 좀 만졌다는 이유로 압수하냐며, 교육청에 신고하려다가 참고 나에게 전화했다며 언성을 높였다.
“선생님, 저희 반에는 오늘 반절 정도가 생리 때문에 결석했어요. 학교생활기록부에도 안 남는 인정 결석이라 안 쓰면 손해라고 생각을 하는 건지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쓰려고 해요.”
친한 후배 선생님이 이렇게 나에게 하소연했다.
“6월 6일 현충일이 화요일이었잖아요. 5일 월요일에 생리 결석을 쓰면 토, 일, 월, 화 이렇게 연달아 쉬는 건데 여자반 담임들 다 긴장했었어요. 5일에 반 애들이 우르르 생리 결석 쓸까 봐요. 어떤 아이는 생리 결석 쓴 지 2주 만에 또 쉰다고 하길래 지난달 말에 쉬었는데 2주 만에 생리를 또 하냐고 했더니, 자기는 원래 날짜가 불규칙하다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당연히 쓸 수 있는 건데 그것 가지고 왜 뭐라고 하냐고 하는 거 있죠? 4월 말에 쓰고 5월 초에 써도 어차피 한 달에 한 번이니까 상관없다는 거죠, 뭐.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 했어요. 학생이 교육청에 신고할까 봐 신경 쓰이니까 그냥 인정 결석 처리해 줬어요.”
요즘 아이들은 무언가를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조금이라도 어렵거나 불편한 일이 있으면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회피하면서 맞닥뜨리지 않으려고 한다. 내신 고사가 일주일 남은 시점에서 학생들과 상담하면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볼게요”라고 말하던 예전 아이들과 달리, “일주일밖에 안 남았잖아요. 지금 해도 어차피 늦은걸요”라고 말하며 아예 시도조차 안 하려고 한다. 수업 내용이 힘들면 노력이라도 해보면 좋으련만 그냥 멍 때리고 있거나 엎드려버린다.
당장의 문제 상황을 회피해버리려고 했을 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라는 것이다. 순간의 불편함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서 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나름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을 직면했을 때 너무나 쉽게 포기해 버리게 되며,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킨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자신만의 합리화가 겹겹이 쌓이다가 결국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습관으로 물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습관을 가진 학생들은 고3이 되어서야 후회하는데, 그때조차도 뭔가 시작할 수 있는 게 분명한데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시험 답안지에 아무것도 적지 않고 그냥 제출하는 아이들이 간혹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아. 서술형 1번은 읽어만 봐도 답을 찾는 게 쉬울 거다, 그러니까 꼭 읽어보라고 해도 안 읽어. 왜인 줄 알아? 못 읽거든. 문제가 너무 길어서…. 문제가 길다 싶으면 아예 읽는 것조차 포기해 버려.”
내 이야기를 들은 같은 영어과 선배 선생님이 계속 말씀을 이어 나가셨다.
“어려움을 겪어도 보고 실패도 맛보고 해 봐야 성장하는 건데 아예 처음부터 힘들다 싶으면 안 해버리려고 하는 게 문제야. 난 예전에 지각이 너무 잦은 학생을 혼낸 적이 있었는데 그날 2교시쯤이었나? 아이가 교실에 없다는 거야. 가방은 있는데 아이만 없는 거지. 알고 봤더니 나한테 혼난 것 때문에 무서워서 바로 집으로 가버렸대. 내가 그렇게 큰소리로 혼낸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 애 엄마가 하는 말이, 지금까지 자기는 딸한테 혼낸 적이 없고, 잘못했어도 말로 조용히 타이르면 다 알아듣는 아이인데 내가 너무 혼을 내서 아이가 무섭다며 학교에 안 간다고 했다는 거야. 아니, 살면서 부모님께 혼나본 적이 없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학교에서 지각을 자주 했다고 담임한테 혼난 것 때문에 집에 가버렸다는 게 말이 돼?”
나는 선배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난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라는 소포클레스의 유명한 명언 외에도 어려움을 극복하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현자의 가르침은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나는 특히 학생들과 상담할 때 윈스턴 처칠의 ‘성공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며, 실패는 치명적인 것이 아니다. 계속 나아가는 용기가 중요하다’라는 명언을 종종 언급하곤 한다. 왜냐하면 많은 아이들이 어떤 것을 하려고 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이유로 “실패할 것 같아서요”라던가 “어차피 안될 거 뻔하잖아요”라는 이유를 들기 때문이다.
실패는 힘들지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이를 극복하고 계속해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인생을 통해 겪게 되는 실패는 어찌 보면 끈기와 성실성, 그리고 더 나아가 성공으로 가는 습관을 길러주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어차피 안될 게 뻔한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