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의지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지 않는다. 변화할 준비가 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을 뿐이다.
-제임스 고든-
성적 상위권을 유지하는 재승이의 엄마가 상담을 위해 학교로 왔다. 고등학교 1학년 말이 되면 아이들이 문과냐 이과냐의 선택을 해야 하는데 재승이는 겨울 방학식이 곧 시작되는데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에는 문이과가 통합되었지만 2학년 때부터는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학과와 관련된 수업을 선택해서 들어야 하기 때문에 문이과 계열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변함없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색해하는 어머니를 앞에 두고 내가 먼저 재승이의 고민 사항을 언급했다.
“재승이가 학년 초에는 경제학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2학기가 되면서 교무실로 가끔 찾아와 사회탐구 말고 과학탐구로 선택을 바꾸는 걸 고려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맞아요, 선생님. 재승이가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글도 잘 써서 상도 많이 받았어요. 중학교 때는 경제 쪽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경제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말했죠.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갔는데 아이가 공부를 잘해 버리니까 주변에서 자꾸 의예과 얘길 하는 거예요. 처음엔 그냥 흘려들었는데 친척들도 다들 의사 시키라고 하고, 또 재승이도 같이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다 의예과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으니 왠지 자기도 마음이 그쪽으로 가나 보더라고요.”
생활기록부에 기록된 학생들의 진로 희망을 보면 교사로서 참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성적이 상위권인 아이들은 대부분 의예과나 이공계열로 가고 싶어 한다. 부모와 주변 어른들의 생각,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인식이 어떤 것인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게 아닌가 싶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공부를 잘하면 이과 계열을 선택한다’라는 인식이다. 전에는 국어나 사회탐구에 관심이 있으면 문과에 가고, 그 반대로 수학이나 과학탐구에 관심이 있으면 이과를 선택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공부를 잘하면 이과, 못 하면 문과’라는 인식이 퍼져버렸다. 몇 년 전에 학교에서 대학교에 들어간 졸업생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준 적이 있었다. 일종의 ‘멘토-멘티’ 같은 자리였는데 거기서 한 졸업생이 후배에게 “너는 공부도 잘하는데 왜 문과 가려고 해? 요즘 교사 되는 것도 쉽지 않고 공무원 되는 거 말고는 문과 가서 먹고살 수 없어. 공부 잘하면 이과 가야지”라고 말했다가 그 자리에 있었던 문과 계열을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적이 있었다.
십 대 아이들은 아직 어떤 한 가지를 선택해서 심도 있게 공부를 해본 적도 없거니와, 더 나아가 자신이 직접 선택한 직장에서 일을 해본 적도 없어서 먼저 사회에 나간 선배들이나 어른들의 말에 곧잘 흔들리기 쉽다. 선배의 말 한마디에 문과 계열을 선택했던 아이들이 교무실로 우르르 몰려와 자신의 진로 변경을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이니 아이들의 팔랑 귀를 나무랄 게 아니라 그런 상황을 만든 어른들이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사 과목을 좋아하는 승호는 진로 상담을 하면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 저는 사람들이 한국사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한국사 전문 작가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엄마가 작가는 돈 벌기 힘들다고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보래요. 그래서 요즘 고민이에요.”
승호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위 ‘돈벌이’가 안 된다는 이유로 다른 진로를 권하는 부모들이 많다. 하루 종일 학교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해 온 아이들은 사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은 아이들은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현실의 벽에 부딪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곤 한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떤 한 가지에 굉장히 관심이 많고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하고 다른 ‘잘하는 것’이 없나 찾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잘하는 걸 선택해야 하는지, 아니면 좋아하는 걸 선택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고민을 들고 학교를 찾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아직 진로를 정하지 않은 아이라면 자신이 다른 과목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하는 걸 선택하는 게 맞지만, 만약 좋아하는 어떤 것이 확실히 눈에 보이는 아이라면 그 자체를 인정해 주는 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승호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한국사 성적이 월등했고, 게다가 한국사를 좋아하기도 했기 때문에 굳이 다른 잘하는 걸 찾도록 유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너는 한국사를 좋아하고, 글 쓰면서 전달하는 것도 좋아하잖아. 그러니 한국사 선생님이나 강사가 되면 좋지. 유명한 강사들은 돈도 진짜 잘 벌어. 그러면서 틈틈이 글 써서 작가 하면 되지. 안 그래?”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제야 승호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경제학자가 되고 싶지만, 의사가 되라는 주변의 권유로 고민 중이었던 재승이가 좋아하는 것은 경제 분야이지만 실제로 다른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수학이나 과학 과목 성적 역시 굉장히 잘 나오고 있었다.
“경제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싶긴 한데 다른 애들에 비해 이과 쪽 점수가 잘 나오는 걸 보니까 의예과에 갈까 고민이 되긴 해요. 이번에 의사들이 쓴 여러 에세이를 읽어 봤는데 저한테 잘 맞을 것도 같고요. 경제학과에 갈지 의예과를 갈지 고민하느라 공부가 안 돼요”
진로를 고민하는 재승이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둘을 굳이 구분하려고 하지 말고 둘 다 목표로 삼는 건 어때? 너는 수학이랑 생물, 화학 과목이 잘 나오는데 의사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겼다면 의예과를 목표로 공부하면서 경제와 관련된 공부도 꾸준히 하면 되는 거지. 시골의사로 유명한 박경철은 의사이면서도 경제, 주식 관련 책도 낸 베스트셀러 작가야. 너도 못 할게 뭐가 있어?”
내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하게 해야 할지, 아니면 잘하는 걸 하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어찌 보면 지극히 이분법적인 생각으로 오히려 아이를 이도 저도 못 하게 만들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면 계속 나아가는 발판이 될 수는 있지만 사실, 그것만 가지고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선택하면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일을 좋아하는 동시에 잘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따라서 그러한 현실 사회를 경험하게 되면 자신이 좋아했던 일을 포기하고 뒤늦게야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내 삶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좋아하는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이나 성취감, 금전적인 여유로움 등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 한계를 느낀다면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일도 계속해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어떤 일을 잘한다고만 해서 그것만 가지고도 행복해질 수는 없다.
『논어』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아는 것, 다시 말해 남들보다 잘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건데, 이 두 가지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 바로 ‘즐기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걸 ‘즐긴다’라고 표현하며 이게 삶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걸 즐긴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일을 진정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요소들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좀 더 잘하는 일을 해야 경쟁력이 생기고 인정도 받는 동시에 자신이 스스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둘 중에 굳이 하나만 골라 선택할 필요가 없으며,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교차점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내 아이가 좋아하는 게 나중에 돈벌이가 되지 않을 것을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조차 모르는 아이들은 공부를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기 어려워하는데, 이에 반해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그 한 가지를 위해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든 잘하는 것이든 간에 그걸 하면서 열정적이게 되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
샤르트르는 ‘Life is C(Choice) between B(Birth) and D(Death)’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아직 십 대밖에 안 된 청소년들에게 평생을 위한 한 가지 진로를 지금 당장 선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요즘에는 C를 Choice(선택), Challenge(도전), Chance(기회), Change(변화) 이렇게 4C로 설명하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도전할 수 있는 의지와 열정이 생기게 된다. 그 일을 해봤다는 경험으로 인해 무언가를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오히려 다른 도전을 하게 될 수도, 그리고 다른 기회를 잡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내 아이가 C를 위한 첫 단계를 밟았다는 것이고 이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반드시 하나의 선택만 할 필요는 없으며, 한 번 정한 선택은 도전하는 과정에서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길 속에서 늘 우리는 그들을 응원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