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직장 상사 분이 나에게 “왠지 A 씨는 건어물녀일 것 같은데?”라는 말을 했다. 건어물녀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나는 그저 웃음으로 답을 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건어물녀’를 검색했다.
건어물녀
일본의 ‘호타루의 빛’이라는 만화에서 유래함. 직장에서는 매우 세련되고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일이 끝나면 미팅이나 데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 와서 츄리닝을 입고 머리를 대충 묶고 맥주와 오징어 등 건어물을 즐겨 먹는 여성을 지칭. 그녀는 일에 지치고 집에서 쉬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혼자 쉬는 것을 좋아하고 연애를 잊게 되어 어느새 건어물녀가 되었음.
집에서 츄리닝 차림으로 편안하게 맥주를 마시며 건어물을 뜯고 있는 호타루
건어물이라는 어감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밖에서는 매우 세련되고 능력 있는 여성이라고 하니 크게 불쾌하진 않았다. 사실 밖에 나갈 때는 제법 멋을 부리는 타입이고, 일도 딱 부러지게 하는 편이다. 딱히 건어물을 즐겨 먹는 것은 아니지만, 집에서는 원피스형 후드티와 무릎이 늘어진 바지를 입고 밖에 나가지 않는 날은 침대나 소파에서 이불과 함께 혼연일체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건어물녀’라는 수식어조차 감지덕지이고 부러움의 대상이다. 지금은 밖에 나갈 때라도 잠시 거울을 보고 옷을 갈아입으며 멋을 부려 봤으면 좋겠다. 아이를 낳으면서 아이의 미소와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을 얻었지만, 잠시 나를 잊는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를 잊지는 않지만, 여전히 아이에게 나의 시간의 대부분을 양보한다. 아침부터 퇴근시간까지 업무와 사람에 멘털이 탈탈 털려 회사에서 돌아오면 가사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밥을 먹고 아이의 학교 통신문을 확인하고 준비물 챙기기와 숙제를 도와준 후 아이와 조금 놀아주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흘러 빨래와 기타 가사일은 다음 날로 미루게 된다. 매일매일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의 외모를 가꾸는 것은 대체로 마지막 사안이 된다.
어느 날 저녁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시장을 갔다가 동네 주변 옷가게에 들렀다. 내 취향에 맞는 옷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아이보리색 니트 티셔츠를 샀다. 예전에는 동네 곳곳에 있는 옷가게들을 보면서 ‘저 가게는 장사가 될까? 저 가게엔 누가 갈까? 50대 어머니들이나 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을 가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도 한때는 직장에서 A 씨는 옷을 너무 예쁘고 세련되게 입는다고, 늘 A 씨 옷차림을 보는 것이 너무 즐겁고 기대된다는 이야기를 듣던 패션 유망주였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찾아 코엑스 지하상가를 서너 시간 쇼핑하다가도 마음에 드는 옷이 없으면 옷을 사지 않고 빈 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가지고 있던 옷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내가 직접 옷의 스타일을 바꿔서 수선해 입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쇼핑할 시간이 없다 보니 동네 가게에서 10분 만에 대충 입을 만한 옷을 찾거나 조금 일찍 일어난 새벽에 홈쇼핑을 멍하니 보다가 세 개 중 한 개는 전혀 입지 않을 세트를 주문하곤 한다.
요즘은 옷에 대해 그저 단정하게 입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현실과의 타협이다.물론 워킹맘도 멋을 부려야 되는 때가 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이나 초등학교 공개 수업, 학예회 등의 행사에 방문해야 되는 때나 회사 행사나 대외적인 업무를 해야 될 때이다. 그럴 때엔 한동안 화장을 하지 않아서 서투른 손으로 아이나 회사의 체면이 깎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화장을 하고 드라이를 한 후, 그날의 상황에 맞춰 입을 만한 옷을 찾아 입는다.
최근 우연히 어느 잡지를 보니 여자의 연령대별 관심사에 대한 기사가 있었는데, 20대에는 취업, 30대에는 결혼과 육아, 30대 중반부터 40대에는 외모 가꾸기라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30~40대에는 아이를 낳고 어느 정도의 시간과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두 달 전에 큰맘 먹고 고가의 LED 마스크 세트를 샀다. 하지만, 아쉽게도 택배가 도착했을 때 기기들이 잘 작동하는지 한 번 사용해보고 아직 사용해 보지 못했다.
나도 하루 빨리 칙칙한 피부를 벗어 던지고 싶다
늘 집에 오면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오자마자 밥을 차린다. 신랑은 주 52시간제임에도 보통 밤 11시경에 집에 오기 때문에 나는 집에 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내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보면 LED 마스크 따위는 좀처럼 사용할 시간이 없다. 하지만, 사실 이런 생각도 어쩌면 내 고정관념과 내가 가두어 놓은 틀일 수도 있다. 앞으로는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조금씩 찾아가야겠다.
“아들아, 엄마 피부가 썩고 있어. 엄마가 오늘은 피부 관리를 할 수 있게 시간 좀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