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일만 펼쳐질 것 같던 광고 기획자의 하루는 몇몇 갑질 하는 대형 광고주 때문에 사회 드라마가 되었고, 우아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을 것 같던 편집 기획자는 마감에 쫓겨 머리를 며칠 감지 못한채 츄리닝차림으로 날을 새고 있었다. 우리가 각자 자신의 회사로 첫 출근을 할 때, 우리는 광고 기획자에게는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런 하루가, 편집 기획자에게는 다양한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며 좋은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하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나는 네가 그 회사를 금방 그만두고 나올 줄 알았어. 너는 칼퇴가 중요하다고 했잖아."
나도 몰랐다. 내가 출판 업계에 이렇게 오래 있을지. 몸과 마음이 힘들 때마다, 생각했었다. '이 일이 나에게 맞나?'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럴 때면 난 내가 직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가 여전히 유효한가를 생각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와 ‘이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 다시 생각해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지...
나는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 내 주변에 있는 영어 전공자들의 직업을 살펴보면 교사와 강사가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해외 비즈니스 관계자, 인재 개발 교육 담당자, 통번역자들이 많다. 대학 동기 중에서도 출판 업계에 입문한 사람은 나뿐이어서 취업 시즌 당시 나는 마치 돌연변이와 같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인 '책 읽기'와 비교적 잘하는 일인 '영어'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를찾아보다가출판사 어학 분야의 편집자란 직업을 선택했다. 나에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비교적 명쾌했다. 그래서 취업할 때 다른 직업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 직업을 선택한 명백한 이유가 있고 그것이 여전히 나에게유효함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 때는 대부분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가 오랫동안 누적되었을 때였다. 생각해보니, 편집자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면서 힘든 시간이 많았다. 마감 때문에 아파도 쉬지 못하고 진통제만 계속 먹어대며 몇 달 동안 야근하며 일을 마쳐야 했던 일, 업무 역량도 부족하고 책임감도 없는 동료와 한 팀이 되어 그 사람의 일을 다 감당해야 했던 일, 내가 팀원들과 함께 이루어낸 일을 어느 순간 상사가 가로채갔던 일...
'아,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이렇게 대응했으면 좀 나았을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힘든 시간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다시 괴로워졌다.
그럴 때면 '이 일을 하면서즐겁고 보람 있었던 순간은 없었나?'를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즐거운 순간도 많았다. 불가능해 보였던 프로젝트를 동료들과 함께 해냈을 때, 처음 만든 책이 인쇄되어 내 손에 쥐어졌을 때, 내가 만든 책의 판매부수가 쭉쭉 올라갔을 때, 내가 만든 책을 보고 있는 독자를 발견했을 때, 같은 업계 편집자가 내가 만든 책을 인정해줄 때, 열심히 가르친 후배가 잘 커서 이제는 나를 서포트해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이러한 순간들은 언제든지 다시 떠올려도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힘들어도 다시 할 만하다는 결심을 하게 해 주었다.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좋을 순 없다. 아니, 좋은 것이 몇 개라도 있으면 행운이다.
올해로 20년 차가 되었다. 과거를 돌이켜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 이 일을 관두고 싶은 순간도 서너 번 있었다. 쉽지 않은 순간들이었다. 두 번은 이직을 했다. 어떤 때에는 멘털을 잡지 못해 갑자기 일주일 휴가를 내고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돌아왔다. 관두고 싶은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유들이 내가 선택한 이 직업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여전히 때때로 자잘은 시련은 온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편안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구나 인생에 굴곡이 있다. 직업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당신에게 맞는지 고민이 된다면 '그 일을 시작한 이유'와 '그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 그 부분이 명확하게 떠오르면 현재 당신을 고민에 빠지게 한 이유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을 고민에 빠지게 한 이유들이 인생의 굴곡이라고 판단된다면, 잠시 힘듦을 조금 내려놓고 굴곡이 지나가도록 몸의 힘을 빼라. 굴곡은 결국 지나가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