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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든씨의 사탕가게
Jan 11. 2020
5) 내 인생에 운이 두 번 찾아왔다.
마흔여섯 살, 삶을 시작하다.
5) 내 인생에 운이 두 번 찾아왔다.
첫 번째는 26살에 호주에 온 것이고 두 번째는 46살, 이번 일을 겪은 것이다.
선생들의 구타와 면도칼을 씹으면서 협박을 해 대던 여자 선배들의 괴롭힘 속에서 고등학교 3년을 버티고 졸업했지만 원하던 대학에는 떨어졌다.
24시간 운영되는 독서실과 친척집을 돌며 잘 씻지도, 먹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졸업까지 했는지… 지금의 나라면 대견하다고 해줬을 텐데.. 열아홉 살의 나는 대입에 실패한 실패자로 세상에 나온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그나마 들어간 대학에선 친구도 없이 겉돌았다. 일할 곳이 넘쳐나던 시절이었지만 외모 때문에 20번이 넘는 실패 끝에 겨우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손님들로부터 그 덩치면 남자로 태어나지 왜 여자로 태어나 이 고생을 하냔 비아냥을 듣곤 해야 했다.
단군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90년대 초의 화려한 시절에 나는 너무나 초라했다. 하루 3시간씩 자면서 일했지만 학비, 생활비는 늘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드라마처럼 일하며 장학금도 타고 좋은 직장에 갔으면 좋았겠지만 학자금 대출마저 없던 그때, 학비와 생화비를 충당하며 좋은 스펙이나 좋은 학점 만드는 건 내겐 무척이나 버거웠고 졸업은 했지만 2년이 넘도록 취업에 실패했다.
열심히 살았고 내가 원한 게 그리 대단한 게 아닌데 왜 삶은 나에게만 가혹한지 억울했고 여기서 뭘 더 열심히 하라는 건지.. 분노가 치밀었다. 열심히 살 이유를 잃었다.... 매일 술을 마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렌지 족”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 평범이라는 단어도 허락되지 않는 내게 나는 매일 물었다.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술을 먹고 많은 사람들과 휘황찬란한 밤거리에서 휘청일수록 외로웠고 내 맘의 슬픔은 깊어만 갔다. 그러다 결정했다. 호주로 가기로…. 영어를 위한 것도 아니고 이력서를 채울 새로운 경험도 아니었다. 아무 기대도, 계획도 없었다. 어차피 난 계획대로 되는 게 없는 인생이니까…
아침 7시부터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밤 12시 커피 전문점 마감까지 일하고 2시간 눈을 붙이고 새벽 신문을 돌렸다. 이렇게 6개월을 해 비행기 값과 3개월 생활비, 영어학교 등록금을 마련하고 아무도 없는 이 곳 호주로 왔다.
20년 전이라 3개월 관광비자도 거절 당하는 일이 다반사인 그때 한달반을 기다려 어렵게 비자를 받고 도착했다. 선진국을 기대했던 나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건물도, 시스템도 한국보다 15년 이상 뒤처진 것 같은 모습에 당황했다.
하지만 길에서 눈이 마주치면 사람들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주었고, 버벅거리며 길을 묻거나 은행에서 일을 볼 때 인내를 가지고 들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골목 끝 모든 손님에게 “honey”라고 부르는 작은 빵집 할머니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나를 “honey”라고 불러 주는 것도 나를 행복하게 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그 사랑스러운 “honey”란 이름도 이미 고마운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빵을 하나씩 더 넣어주며 “take care”라고 말해주며 내 마음을 배부르게 해 주었다.
난생처음 매일 하루를 기대하며 행복하게 일어났다.
새벽 5시면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새벽 트레인을 타고 “내” 영어학교로 갔다. 매일 7시 전에 도착해 문이 열리는 8시까지 계단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70~80 명을 수용하기에도 부족한 동네 작은 건물 2층에 자리한 이 비즈니스 학교엔 1600명의 학생이 등록해 있었다. 등록하고 학생비자를 받은 후 모두 돈을 벌러 다니는 소위 ” 학생비자 장사”를 하는 조악한 환경의 학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지겨워하던 6시간의 수업도 좋았고, 늘 그렇듯 혼자 구석에 앉으려던 내게 다가와 음식을 나눠주는 친구들도 생겼다. 무엇보다도 석 달간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 않고 학교만 다닐 수 있다는 게 미치도록 좋았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고 생활비가 떨어졌다. 한 달에 $300로 살겠다고 계산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한 달 뒤 돌아가야 하는 내게 일자리를 줄 곳이 있을 리도 없었지만 그때가 IMF 시절이었다. 돈이 떨어진 유학생들이 넘쳐나면서 2주 무급으로 일을 시키고 해고 하기를 반복하며 유학생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들이 빈번해지는 상황에서도 교민사회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워졌다.
비자가 끝나기 3주 전 일요일 저녁, 2불이 남았다. 일주일 기차 티켓이 남았으니 이 것이 끝나면 한국으로 가겠구나 싶었다. 일주일 먹을 음식 살 돈도 없고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실망스럽지도, 슬프지도, 비참하지도 않았다. 평생 못 느껴본 모든 행복감을 다 누렸다. 신데렐라의 12시 종이 울릴 때가 된 것뿐이다. 다시 누더기를 입고 생활에 몰리겠지만 궁전 파티에 와 꿈꿔 볼 수도 없던 아름다운 옷을 입고 춤을 추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게 꿈같은 이곳이 잠시라도 허락된게 감사했다.
다음날 월요일, 교실로 들어가려는 데 교실 문에 등록 학생수가 모자라 수업이 없어지게 됐다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한국인 직원을 찾아갔을 땐 이미 몰려든 다른 학생들과의 실랑이로 정신이 없었다.
학생들 무리 뒤에서 서성이다, 혹시 3주 남은 수업료를 환불받을 수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의견을 말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지만 교장실로 찾아갔다. 다행히 교장실에 있던 교장이 나를 들어오라 허락해 주었다. “ I need refund. My class cancel.” 이 수준의 영어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했지만 교장은 몸을 내밀고 정성껏 들어주었다.
무슨 일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는 그에게 떠듬떠듬 절반은 말로, 절반은 노트에 단어를 적어가며 설명을 했다. 내 수업이 3주 남았는데 갑자기 취소가 됐다고 그 삼 주 치를 돈으로 돌려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생활비가 없어 그걸로 일주일을 살고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며 내게 $2가 남았다고 말했다. 주머니에서 $2를 꺼내 보여주니 그때껏 몸을 내게로 향해 열심히 들어주던 그가 의자 깊숙이 앉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다시 한번 내게 물었다. “what do you want?”
나도 모르게 답이 금방 나왔다.
“ I want to study.”
refund가 그 상황에 맞는 답이었겠지만 내 평생 처음 누군가가 내 상황을 그렇게 따뜻하게 들어주는 경험을 해본 탓인지 그의 질문이”what do you want from me?” 가 아닌 “what do you really want for you?” 로 느껴졌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았던, 하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망설임 없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20년 전일이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분과 장면들이 하나하나 고스란히 기억난다. 엉망인 영어로 내 어려운 경제상황을 설명하는 상황이었지만 비참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얼마간의 침묵 후 그가 내게 말했다. 매일 7시에 네가 학교에 나오는 걸 안다고 학교를 좋아하는 것도, 네가 정말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다 진심이란 걸 안다고…. 그래서 네게 기회를 줄까 한다고…
띄엄띄엄 알아듣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지만 일주일 버틸 생활비가 나올 거란 생각에 기뻤다. 수업은 이제 못 듣지만 비행기가 뜨는 그날까지 학교에 나와 지내다 가야지… 내 입에선 연신 thank you, thank you 가 쏟아졌다.
뒤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내가 못 알아듣자 그는 나를 행정실로 데리고 가서 한국인 담당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교장이 자리를 뜨고 그 직원이 내게 한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1년 학비를 장학금으로 주신데요. 당장 일자리 하나도 만들어 주라고도하시는데… 무슨 일인지… 참.. 어쨌든 이 곳에서 일하면서 이렇게 운 좋은 학생은 처음이네..”
다음날부터 나는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그 날의 기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내 평생 처음으로 "행운"이란 게 내게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