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시탐탐 May 07. 2022

나도 때때로 '진상'이 된다.

: 일을 빨리 해결하는 법.


예전에 함께 일했던 대표님 중 일을 해결할 때 '과격'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막무가내인 분이 있었다. 기분 좋은 햇살이 비추던 어느 날, 대표님이 화가 나신 채 사무실로 들어오셨다. 핸드폰이 갑자기 고장 나서 수리센터에 가셨는데 개인과실이라며 꽤 비싼 수리비를 요구했단다. 대표님은 하루 종일 여기저기 알아보시더니 그게 개인과실이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한 경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다.


다음날 대표님은 다시 수리센터에 갔다. 물론 들어갈 때부터 평범하게 들어가진 않았다. 문을 발로 차면서 소리부터 질렀으니까. 거기 있던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아, '진상'이구나!"

결국 대표님은 수리비 없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핸드폰을 수리했다. 그때 나는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대표님이 많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대표님께 왜 그렇게까지 '과격'하게 하셨냐고 물었다. 대표님은 너무 당연한 듯- 그게 일을 빨리 해결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나도 때때로 '진상'이 된다.


이전 사무실에서 복합기가 계속 말썽이었던 적이 있었다. 월말이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복합기에 종이가 계속 걸리고, 긴 줄이 쭉- 그어진 채로 출력이 됐다. 사무실 경력 15년 차라 웬만한 복합기는 알아서 고치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이번에는 전문가를 불러야 해결이 가능할 듯했다. 결국 출장 기사님이 오셔서 여기저기를 만지시니 괜찮아졌지만... 왜 이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하셨다.


고친 복합기는 2-3일이 지나자 똑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그렇게 고치면, 고장 나기를 반복하다 결국 업체는 복합기를 교환해줬다. 그런데 교환한 복합기마저 똑같은 문제가 계속 발생했다. 복합기 때문에 계속 야근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는데 업체 담당자는 중고제품이라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쓰라고 했다. 결국 나는 업체에 계약해지를 요구했다.


그런데 계약기간이 남아있기 때문에 계약을 해지하면 위약금을 내야 한단다. 나는 사용할 수 없는 복합기를 해지하는데 왜 위약금을 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지만 업체 담당자는 그게 '원칙'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담당자는 회사의 '원칙'을 지킬 수밖에 없다. 권한이 없는 담당자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을 바꿔달라고 했다.


이후 업체 대표에게 차분히 지금까지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런데 업체 대표는 '원칙'이니 위약금을 내고 해지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되돌이표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나는 결국 '진상'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출근하면 업체에 연락을 해서 출장 기사님을 요청했다. 복합기가 고장 나면 A/S를 해주는 건 업체가 말하는 '원칙'이니까.


나는 내 일을 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업체는 매일 A/S를 요구하는 나 때문에 꽤나 골치가 아팠을 거다. 결국 얼마 후, 업체는 위약금 없이 계약을 해지해줬다. 아마도 그 업체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진상' 고객이었겠지만- 업체를 바꾸고 나서 6개월 동안 복합기는 한 번도 속을 썩이지 않았다.




너도 '진상'이 되면 돼!


사실  글을 쓰게 된 건 후배로부터 걸려온 전화 때문이다. 후배는 지금 <장비 보험> 문제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상황이었다. 보험담당자가 바뀌었는데... 이미 이전 담당자에게 제출한 서류들을 전부 다시 보내달라고 했단다. 이해는 안 갔지만 빠른 처리를 위해 후배는 한번 더 서류들을 제출했단다. 그런데 이후에도 담당자는 이러저러한 서류를 계속 요구했고, 후배는 그게 왜 필요한지 물었지만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자 후배는 지금까지 보험을 처리하면서 이런 적이 없었다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맞냐고 물었는데... 담당자는 이게 '원칙'이고, 그동안 이렇게 진행하지 않았다면 이전 담당자들이 잘못한 거라는 말을 했단다. 담당자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보험을 처리받아야 하는 입장의 후배는 눈물을 삼키며, 담당자가 원하는 것들을 계속 넘겼다. 그런데도 보험처리는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뤄지는지만이라도 얘기해 달라고 했더니 담당자는 처리 중이라고 전화를 끊어 버렸단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바에야 보험처리를 안 받고 싶지만 회사 장비이기에 그럴 수도 없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너도 '진상'이 되면 돼!"

후배를 골치 아프게 하고 있는 보험의 경우는 담당자의 재량에 따라 얼마든지 쉽게 처리가 가능한 건이다. 실제로 같은 보험을 나도 별다른 수고 없이 처리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의 담당자가 말하는 '원칙'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 '원칙'을 지키고 싶은 담당자의 입장도 분명 있을 거다. 하지만 처리 과정에서 서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도 분명 있어야 한다.


후배가 계속 참는다고 해서 이 상황이 순조롭게 끝나지는 않을 거 같았다. 이 상황을 빨리 끝내는 방법은 어쩔 수 없이 후배가 '진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후배에게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지금까지 진행과정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럼 그 담당자한테 피해가 가지 않을까요?'

'응. 근데 그럼 네가 겪는 피해는 줄어들 거야!'


다음날 아침 일찍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보험이 바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쉽게 처리될 것을 그동안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나! 생각하면 다행이다라는 마음보다는 화가 난다고 말했다.




나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테이프 조각이 나와도 그냥 넘긴다. 새로 산 냉장고가 불량이라 교환하는데 일주일 이상 걸려도 기다린다. 이런  일상생활뿐 아니라 일을 하다 불편한 일들도 생겨도... 정말 웬만해서는 참는 편이다. 내가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나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결국 '진상'이 된다.


어릴 때는 '진상'이 되어야 일을 빨리 해결수 있다는 대표님이 부끄러웠다. 물론 아직도 그 '과격함'은 분명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는 '진상'스러운 행동도 옳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진상'이 되는 게 일을 빨리 해결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진상'이 되기도 하고, '진상'이 되라고 말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일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 '진상'이 되어야 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상'이 되는 걸 선택하는 일들이 안 생기기만을 바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아하는 사람이 직장상사가 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