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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Jun 20. 2022

경로를 이탈하더라도- 길은 다시 찾으면 된다!

: 건강검진 후기.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내가 운전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나는 심각한 길치에 방향치다.) 영화 제작팀 일을 15년 넘게 했지만 여전히 길을 잘 헤맨다. 그래서 새로운 곳에 갈 때면 일단 무조건 '헤맨다'를 전제로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움직이는 편이다. 조금 불편함이 있긴 하지만 약속시간에 늦은 적은 거의 없다. 그리고 잘 헤매긴 하지만 길은 반드시 찾는다. 오늘은 문득,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이 아닌가?' 헤매기도 하지만 결국 길은 찾게 되니까!




건강검진을 받았다.


특별히 이상증세가 있어서가 아니라 휴가기간이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건강검진 대상자이고, 마침 남동생이 생일선물 사라고 준 돈이 있었기 때문에 몇 가지 받고 싶은 검사를 추가한 뒤 여행 가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내 몸으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고장'을 받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익숙한 영화일을 떠나 새로운 드라마일을 시작한다는 건 스트레스가 많았다. 거기에 전 작품이 끝나고 쉬지 않고 일을 해서인지 몸은 계속 힘들다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바. 빴. 다.

다른 사람들도 마흔부터는 체력이 훅-떨어지고 힘들다고 하니까! 나도 그런 거라고... '충전'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차트를 보는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참을 갸우뚱- 하시더니만 일단 큰 병원에 가서 복부 CT부터 찍고, 다시 오란다. (이 병원은 CT장비가 없단다ㅠㅠ 이래서 다들 큰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나 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를 생각하며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홍대 근처 큰 병원에서 복부 CT를 찍고, 다시 결과를 듣기 위해 건강검진을 받았던 병원으로 돌아갔다. 복부 CT까지 찍었지만... 더 어려워진 문제를 만난 듯 곤란해하시던 선생님은 결국 대학병원 진료를 받아보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제대로 된 진단을 못해준 게 미안하셨던  의뢰서를 써주시며 다음날 오전, 신촌에 있는 대학병원을 예약해주셨다. 


그러니까 뭔가 문제는 있지만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는 답변을 받은 채 건강검진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니 오후 5시가 넘어있었다. 전날 대장내시경 한다고 6시부터 굶었으니까 꼬박 12시간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셨지만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엄마는 내가 19살 때 돌아가셨다. 그때 엄마 나이가 39살이었다. 그래서 어릴  50살까지만 살자고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41살이 되고 보니 50살뿐 아니라 60-70살도 눈 깜짝하면 올듯했. 그러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더 오래 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과 얼마 전까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었다.(안정적인 직장인을 선택한 것도 촬영 현장이 체력적으로 힘든 것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프리랜서로 일하는 게 불안했기 때문도 있었다.)


당장 내일 사고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하고 싶은 건 하면서 살자고! 다짐은 했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반쯤, 어쩌면 반보다는 조금 더 많이 참으면서 살았던 거 같아 지나 온 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이내 헛헛함이 휘몰아쳤다. 아직  대학병원은 가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에 온갖 나쁜 생각들이 상상에 상상을 더해갔다.




대학병원은 처음이라서


서울에서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촬영이나 장례식장이 아니라 대학병원에 내가 진료를 받기 위해 간 건 처음이었다. 시골에서 막 상경한 사람처럼 헤매고, 묻고, 찾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문득 '그동안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나하나 감당하기벅차서 결혼보다는 혼자 사는 삶을 선택했었는데... 이럴 때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한 건가? 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고민까지 하다 드디어 교수님을 만났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는 뭐라던가요?'

'대학병원에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전날 병원에서 제대로 된 진단을 못 들어서 대학병원에 오면 척척 답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교수님은 어제 선생님보다 더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흉부 CT와 피검사를 추가로 고, CT만 전문적으로 판독하시는 분께 의뢰를  해보겠다고. 대학병원이라 당일 검사는 안 되는 줄 알고, 아침에 두통약과 바나나 1개를 먹고 온 탓에 금식 후 내일 오전에 다시 병원에 오기로 했다.


'왜  나일까? 왜 하필 지금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건강검진을 받고, 2일째 대학병원에서도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미 답은 정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험을 찾아서 확인하고, 잘 죽는 방법까지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39살에 어린 자식 둘을 남기고 곧 죽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엄마가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지 떠올라 새삼스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병원으로 갔다.


오전 9시. 오전에 추가 검사가 가능하다고 하셨기에 일찍부터 움직였는데 당일 예약이라 오후 1시까지 기다리란다. 3일 동안 제일 많이 들은 말이 "기다리세요~"인 듯하다. 그렇게 다시 기. 다. 리. 며- 한쪽 구석에 앉아 몇 시간을 병원 안의 사람들만 가만히 보고 있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 잠시 사라진 엄마를 발견하고 소리부터 지르는 아들, 두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나만큼이나 대학병원이 낯설어 보이는 노부부 그리고 나보다 10살은 더 어려 보이는 여자까지... 나 혼자가 아니라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까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대학병원은 처음이라...' 

검사만 끝나면 바로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검사 결과를 듣는 진료는 10일 후에나 가능하단다. 또 기다려야 한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10일 동안이나 전전긍긍하며 폭탄을 안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으면 분명 화가 났을 텐데... 갑자기 배가 고팠다. 진료실을 나와 병원 로비에 있는 식당에 가서 돈가스를 시켜 먹고, 스타벅스에 가서 선물 받았던 쿠폰으로 커피와 케이크도 먹었다. 배가 든든해야 긍정적인 생각도 할 수 있다.




경로를 이탈하더라도, 길은 다시 찾으면 된다.


이제 겨우 새로운 길(=직장인)에 적응하는 중이었는데 어쩌면 경로를 이탈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길을 헤매는 것에는 제법 익숙하다. 그러니까 만약 경로를 이탈하더라도 조금 헤맨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그래 왔듯 길을 다시 찾으면 된다.


나는 착실한 듯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늘 경로를 이탈하며 살았다. 

당연히 대학을 갈 줄 알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가장이 되어야 했고, 반듯한 직장을 다니다가 영화판에 뛰어들었고, 영화일이 익숙해지자 이번에는 잘 모르는 드라마일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있었고, 내가 한 선택도 있지만... 이 모든 선택들은 어찌 보면 경로 이탈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순간들은 늘 '끝'인 것처럼 막막하고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들을 버텼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지금은 여러 번 경로를 이탈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경로를 이탈했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 일을 하게 됐고,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경로를 이탈하는 게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불과 3일 전까지만 해도 지금 내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제주도에 바다 멍~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북카페에서 밀린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충전'하고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온갖 상상에 상상을 더 한다고 해도 10일 후에 나는 괜한 상상들을 했다며 웃고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멀리 경로를 이탈할 수도 있을 거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경로를 이탈했을 때 그때 다시 방법을 찾으면 된다. 

불과 3일 동안- 오르락내리락 휘몰아치던 마음을 정리하면서 갑자기 고장 난 세탁기처럼 나도 A/S 받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을 계기로 앞으로는 몸이 보내는 '경고장'을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는 다짐도 한다. 그리고 오늘은 오늘을 즐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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