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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Oct 08. 2023

나에게 관대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

: 나와 '거리두기'


오랜만에 글이 쓰고 싶어져서 책상에 앉았다. 처음 글쓰기를 다짐했을 때만 해도 눈뜨면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 모든 것들이 글쓰기 소재로 다가오는 거 같았다. 일을 하면서도 메모장을 여러 번 기웃거렸고, 주말이면 커피숍에 출근하듯 나가서 글을 썼다. 그러다 드라마 일을 시작하면서 긴장도 많이 하고, 처음 해보는 일이다 보니 시간도 두세 배로 들어 조금씩 글쓰기가 우선순위에서 멀어졌다.


100개! 처음 글쓰기의 목표였다. 98개를 올리고, 마지막 2개를 채우기 위해 피곤해서 쓰러지듯 누워서도 브런치를 기웃거리던 것도 잠시 글쓰기는 점차 잊혀져 갔다.




다시 브런치를 열기까지 1년, 그리고 1년만 버텨보자라고 시작했던 직장생활도 두 달 후면 2년이 되어간다.

영화일을 하면서는 촬영이 끝나고 나면, 후반작업이 있다 보니 후반작업 기간에 스스로를 재정비하고 충전했었다. 그런데 드라마 일을 하는 직장인은 끝이 없었다. 한 번에 1작품을 하던 프리랜서를 15년 가까이했는데 드라마 일을 하는 직장인은 한 번에  2작품이 들어가기도 하고, 안 해본 장르의 작품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달리기만 하던 8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진행하던 작품이 엎어졌다.


결정하기까진 어려웠지만, 결정함과 동시에 짧은 일정 때문에 휘몰아치듯 정신없이 달린 작품이었다. 처음 해보는 것들이 많아 걱정이 많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곧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표님이 달리고 있던 내 머리채를 잡고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버렸다.

캐스팅에, 스탭라인업까지 99% 확정이었는데 1%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작품이 너무나 허무하게 엎어질 수도 있다는 걸 차디찬 바닥에 누워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다.


황금 같은 휴식인데 움직이기 싫었다. 생각하기 싫었다. 누군가를 만나기도 싫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이게 번아웃이라는 건가? 나는 방전됐는지도 모른 채 방전됐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몸은 충분히 충전이 되었는데 머리도, 마음도 어딘가 공허한 기분이 계속됐다. 출근을 하고, 할 일을 체크하고, 해야 할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산책을 한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듣고, 보고, 웃고, 떠들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뇌도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둔 거 같았다.

지금 내 뇌를 들여다보면 까맣게 그을음이 가득찼을 거 같다. 식염수에라도 담갔다가 빼고 싶은데... 윤활유라도 부어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나는 그냥 나를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 문득, 내가 지금 나 자신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두기'는 내가 가끔씩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치고 힘들 때, 그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과도 어느 순간, 어느 포인트에서는 실망을 하게 되고, 그 사람의 모든 것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을 설득하려 들거나 혹은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면 서로 지치게 된다. 그런데 때 잠시 '거리두기'를 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는 절대 이해 안 됐던 것들이 별일 아니게 느껴진다. 너무 싫었던 점들은 단지 나와 다른 것뿐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쉬워지곤 한다. 

'거리두기'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 자신에게도 필요한 거였을까?


영화 일을 하다가 드라마 일을 하게 됐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게 아닌데 괜찮은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 일을 하면서 내가 선택한 작품이 아닌 하기 싫은 작품을 하게 되었을 때 내가 이런 거까지 해야 하나?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닌데 괜찮은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작품을 통해서 어떤 드라마도  할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경주마처럼 쉬지 않고 달리다가 말에서 갑자기 내려오게 된 지금,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은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마흔이 넘어도 모든 일들이 내 생각대로는 흘러가지는 않는 거 같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시 말위에 올라타기 위해 나를 질책하기보다는 좀 더 나 자신과 '거리두기'를 할 필요가 있는 거 같다. 무의미하게만 보이는 이 시간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명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은, 나 자신에게 관대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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