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타령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집에서 소소하게 음식을 해먹으며 보내던 시간이 참 좋았다. 남편은 차가 막히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왔는데, 올 때마다 한두봉지 장을 봐서 들고 오는 모습이 소박하고 귀여웠다.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질리지도 않고 먹는 메뉴가 있다면 단연 샤브샤브다.예전 식단 글에서도 썼지만,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매주 목요일은 샤브샤브 데이. 처음에는 육수도 따로 내고 고기도 여러 종류 준비해가며 그럴듯하게 먹었는데, 갈수록 간소해졌다. 이제는 녹색 야채 한가지, 버섯, 모둠 어묵 한 줌, 코인육수, 차돌박이 1파운드면 끝이다. 준비하는 데 5분도 안 걸리고, 눈 감고도 착착 준비할 수 있을 정도다.
샤브샤브에는 배추를 꼭 넣는 편이라 작은 알배추 한 포기 정도는 늘 떨어지지 않게 사두곤 했다. 시아버지께서 뒷마당에 배추를 심어주셔서 자란 배추를 솎아 넣어 먹기도 했다. 벌레를 제때 잡지 못해 앙상해진 배추잎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유기농’에 ‘자급자족’이라며 뿌듯해했다.
몇 주전부터 남편이 장을 볼 때마다 은근슬쩍 말한다.
남편: “배추는 한 포기씩 따로 사는 것보다 박스로 사는 게 훨씬 저렴한 것 같지 않아?”
나: “더 저렴한건 아는데 보관하기가 어렵잖아”
남편: “김장해서 장독대에 뭍으면 되죠, 형네 장독대가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영감을 받은 건지, 갑자기 남편이 장독대에 꽂혔다. 뒷마당에 장독대를 묻고 묵은지를 만들어 먹는 로망이라니. 겉모습은 깍쟁이 도련님인데 속은 전형적인 ‘자연인’ 그 자체다. 그냥 흘러가는 말인줄 알았는데 여러 번 얘기하는 걸 보니 진짜인가보다. (사람들이 안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않겠습니까)
결국 의견을 좁히지 못한 우리는 양가 부모님 찬스를 써본다. 남편이 어려서 이민 와서 미국에서만 살아서 부모님은 남편을 검머외, 미쿡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우리 사위가 아주 토종이구만“ 하시며 박장대소하셨다. 예전엔 장독에 묻은 김치가 맛있어서 사람들이 탐냈다며 갑자기 추억여행까지 하신다. 1:0.
다행히 시부모님은 내 편이었다. “아이고 안돼- 미국 땅엔 지렁이도 많고 관리가 쉽지않아. 굳이 그러면 김치 냉장고를 사는 게 낫지.” 휴- 다시 1:1.
솔직히 나도 (당연히) 김치를 좋아한다. 그런데 ‘김치없이 못살겠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유학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현실적인 이유로 나름 적응한 것이다. 비싼 김치를 일부러 사 먹지 않게 되었고, 밥에 김치와 국이 꼭 있어야하는 ‘한식파’ 입맛도 바뀌었다.
결혼하고는 종종 간단히 담글 수 있는 깍두기나 무생채를 해먹기도 하고, 감사하게도 시부모님이 동치미며 배추 김치를 종종 싸주셔서 그 정도면 우리 둘이 먹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김치(그리고 장독대)타령은 자연스럽게 흐지부지 끝나는 것 같았는데 장을 보고 계산하는데 남편이 마트 점원에게 배추 한상자도 같이 계산해달라고 한다. 응??? 이렇게 순식간에 침투하다니.
박스에 가득 든 실한 배추를 보니 부담스럽다. 우리는 배추 한 포기로도 2주는 먹는데 이걸 어떻게 다 먹지? 샤브샤브에 신선한 배추를 넣어먹는 소소한 날이 아득하다. 넣어둘 곳도 없어서 베란다 한켠에 배추를 며칠 두었다가 시부모님께 반을 나눠드리러 갔다왔다. “시들기 전에 김치 해야될건데” 하시는 어머님 말씀이 신호탄이 되어서 결국 미루고 미루던 김치를… 정말 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 포기김치를 담가먹는 날이 올 줄이야.
남편은 이 날만 기다린 사람처럼 신나 있었다. 천일염을 물에 풀어서 배추 사이사이에 뿌리고, 간간이 뒤집어가며 골고루 절이는 모습이 꽤나 열정적이다. 나는 “오빠가 해”하고 지켜만 볼 심보였는데 열심히 조물거리는 남편을 보고 조금 도와보기로 했다. 무채를 썰어서, 양념을 만들고, 새우젓에 찹쌀풀을 준비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고춧가루가 이렇게 많이 들어가나?’, ‘새우젓은 이만큼 넣으라고 했는데 너무 짠 건 아니겠지?’ 평소 레시피를 맹신하는 편이라 하라는 대로 곧잘 했었는데 의심이 솓구친다. ‘이렇게 한꺼번에 했는데 맛이 없으면 어떡하지..’ 걱정부터 앞섰다(근데 4포기 밖에 안했다).
남편은 특유의 긍정회로를 돌린다. “맛없으면 푹 익혀서 음식해 먹으면 돼. 그럼 맛있을걸?” 우리집 공식 간잽이인 남편은 김칫소가 잘된것 같다면서 연신 맛을 본다.
없는 재료들은 과감히 빼고, 김칫소를 골고루 넣고나니 그럴듯한 포기김치 모양새가 난다. 겉잎으로 포근하게 감싸주겠다면서 배추를 마치 아기 다루듯이 소중하게 감싸고 통에 차곡차곡 넣는다. 집중하고 있는 남편을 보니 ‘그래도 하길 잘했다’ 싶었다. 한 포기는 따로 담아 시부모님께 맛보시라고 가져다드렸다. 웬만해서는 금방 ‘맛있다’하지 않으신다는 어머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셨단다.
서로 뿌듯해하면서 하이파이브를 날리는데 문득 마음이 울렁인다. ’나도 엄마한테 우리가 만든 김치 맛보시라‘고 하고싶다. 김치를 만들면서 한국에 계신 엄마가 자꾸 떠올랐다. ‘올해는 50포기만 해야겠다’하시던 엄마. 이 수고로운 일을 해마다 어떻게 해오셨을까. 엄마 김치에는 뭐가 들어갔길래 그 맛이 났을까.
우리가 언제 찾아도 부족하지 않게, 넉넉하게 해두고 싶은 마음이었겠지싶다. 김장은 엄마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두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운 엄마에게 남편이 김치를 버무리고 있는 사진을 보냈더니 ‘김장독 땅에 묻었나?’ 웃음 섞인 답장이 돌아온다. 재료도 부실하고 엄마가 해주시던 김치 맛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독립하여 어른이 된 기분이 든다. 언젠가 우리도 오늘을 떠올리면서 추억여행을 할 것이다. 서툴지만 함께 담갔던 첫 김장. 이만하면 겨울 내 반찬 걱정은 없겠다. 마음이 배어있는 김치가 서서히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