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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Sep 21. 2023

에든버러 일기


# 서툴러도 괜찮은 나이


어딜 가나 서툴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특별히 어렵지는 않은데, 사소한 것들이 신경이 쓰인다. 내가 팁을 제대로 준건지(미국처럼 꼭 팁을 줘야 하는 건 아닌데, 요즘은 어딜가나 팁을 기대하는 분위기), 길을 제대로 건넌 건지(이곳은 자전거 도로가 따로 있어서 이거 대충 건넜다가는 사이클리스트들에게 눈빛으로 큰 욕을 먹는다), 이것 외에도 뭔가 이들의 암묵적인 룰을 그르친 건 아닌가 눈치를 보게 된다. 삶에 서툴다고 느끼는 기분은 오랜만이고, 그게 학생이라는 느낌 아니겠어 싶기도 하다. 서툴러도 실수해도 괜찮은 울타리 안에 있다.


# 숲으로, 숲으로


정신이 없었던 여름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향인의 충전이 필요했던 건지, 장장 3일을 집안에만 있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고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노력해서 다시 일상의 루틴을 만들어야지라고 나를 꾸짖었지만, 어쩌다 보니 제대로 게을러지고 말았다.


한참을 그렇게 퍼져있다가 문득 숲으로 가고 싶어졌다. 바람이 불고, 새소리가 들리고, 여러 가지 풀과 나무 향기가 가득한 곳.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긴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스코틀랜드만의 분위기를 담고 있는 숲과 들판이 있는데, 이곳에는 조용히 혼자서, 혹은 반려동물과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서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용기를 내서 아침이고, 저녁이고 시간이 나면 나가서 무작정 걷게 되었다.



바람이 많이 불고 공기는 차갑지만, 언덕을 오르다 보면 곧 추위를 잊게 된다. 20분쯤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다다르고, 안갯속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촘촘하게 예쁘고, 매력적인 도시에 다시 한번 반하는 순간. 이 도시만의 색과 향기를, 어질 할 만큼 좋아하게 되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는 잔디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고, 또 다른 언덕에서 누군가는 말없이 혼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자연 속에서는 그 누구도 외롭지 않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는 걸까.


숲 속을 혼자 거닐며 머리 비우기는 이곳 사람들에게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I feel empty, gloriously empty.”


한 책에서 완전히 비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 기분인지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기억이 났다.


# 웰컴위크


학기가 시작되고 같은 과 학생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한 친구는 중국에서 왔는데 영어를 잘 쓸 일이 없었다고, 영어로 이렇게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이 난다고 했다. 나는 이런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 신선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내가 어떻게 이중언어를 쓰는지를 묻기에, 이런 질문이 오랜만이라 어디서 시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질문에서 사뭇 진지함이 느껴져서 그냥 늘 해왔듯이 미국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렇다고 대충 농담으로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영어로 읽고, 소통하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지금 뒤돌아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어떤 탈출구 같은 거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운 언어로 나를 표현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그런 신기한 마음이 나를 계속해서 이 언어 속에서 살게 했다고 말했다.


이 질문에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답한 적이 있었나 싶어서, 나조차도 아, 내가 이런 마음이었구나 생각하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웰컴 위크가 끝이 나고, 곧 수업이 시작된다. 시작이라는 느낌은 두근거리지만,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인 내가 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도 나쁘지는 않다. 어쩌면 산다는 건 계속해서 모르는 것을 마주하고, 그것에 지지 않는 연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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