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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 Apr 01. 2024

서랍 속 10년 전 영국 이야기

Chapter1. 취직이 싫어 어학연수를 떠났던 스물여섯

2013년 대학교 4학년 시절, 취업을 준비하며 내 학교 동기들의 진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꿈을 좇는 자(혹은 그 비중이 큰 자)와 돈을 좇는 자(혹은 그 비중이 큰 자).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던 우리에게 방송사에 들어가는 것만이 꿈을 좇는 것이고, 일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만이 돈을 좇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 비중의 차이일 뿐이었고, 나는 어중간한 그 두 갈래의 틈새에서 잠시 선택을 보류한 채 부모님께서 지원해 주신 2천만 원을 갖고 영국으로 6개월 어학연수를 떠났다. 내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을 해 무거운 백팩 하나와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한인 민박으로 향하는 길목 길목들이 기억난다. 미래에 대한 불안정한 마음과 묘한 설렘이 뒤섞여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나 스스로도 낯설다고 느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재수 1년, 대학 4년 반, 군대 2년을 꾸역꾸역 밟아오며 결국 달이 지구를 감싸 돌듯, 나는 내 인생의 시작점에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경로를 밟아왔을 뿐이었다. 중산층 가정에서 커 온 한국 남자의 궤적 그 이상 이하도 아닌 표준서같이.


하지만 스물여섯의 나이에,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나는 그 무엇보다 일반 대기업에 취직하는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영화를 보면 그래도 흥미로운 구석이 하나쯤은 나와야 하는데, 이런 남자의 인생 내러티브는 너무나 뻔하지 않을까. 고민 없이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나는 중년이 되어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튼 이런, 저런 고민들을 안고 런던에서 브리스톨로 넘어가기 전 며칠 간의 여행을 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당시 미리 현장에 가면 제일 앞열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는데, 목을 뻣뻣하게 들어야 하는 좌석이어서 인기가 다소 없었기에 현장에서 떨이로 파는 것이라고 들었다.

런던에서 현장 예매를 통해 제일 앞 줄에서 본 <빌리 엘리어트>

나는 그렇게 그 뮤지컬을 적당한 이방인의 시각에서 오히려 더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비로소 해방감을 좀 더 크게 느낀 순간이었다. 런던에서의 여행을 즐기며 나는 불안정한 마음들을 점차 지우고 브리스톨에서의 시간들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런던에서 서쪽으로 2시간 기차로 달리면 브리스톨이 나온다. (London Paddington - Bristol Temple Meads)


브리스톨에서는 EC Bristol이라는 어학원을 6개월 간 등록했는데, 첫 달은 안전하게 학원과 연계된 현지 홈스테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 시절에 나는 이 2천만 원을 꽤나 아꼈던 것 같다. 내가 번 돈도 아니었고, 확고한 목표를 위해 돈을 썼던 게 아니었던 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학원비를 빼면 가장 큰 비중은 홈스테이, 그다음은 식비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식비를 줄여보기로 했다. 아침에는 건강을 위해 토마토 두 알, 점심에는 세인스버리(Sainsbury, 우리나라의 동네마다 있는 GS마트 격)에서 1파운드에 세 개짜리 혜자(?) 도넛세트를 주로 먹었다.


그리고 주에 한두 번씩 같은 반 친구들과 소셜런치를 하는 날에는 서브웨이에서 5파운드 런치 프로모션 세트를 먹으며 꽤 많은 지출을 아낄 수 있었다.

영국에서의 단짝이었던 마르코Marco

그 당시 재미있는 기억으로는 나와 주로 어울렸던 스위스 친구 마르코도 나를 따라 세인스버리 도넛을 주로 사 먹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물가 비싼 스위스에서 온 친구의 따라 하기 절약 정신이었을까, 남 모를 배려심이었을까. 그의 놀랍도록 단순한 사고패턴을 생각하면 전자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다음은 숙박비였다. 나는 학원에 처음 등록하며 연계 숙소로 홈스테이를 한 달간 계약해 거주하고 있었다. 영국의 전형적인 중년부부와 세 딸이 사는 3층 집에서 함께 지냈다. 주말에는 동네 벼룩시장도 가고, 라면과 김밥 등 한국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추억을 쌓았지만 꽤 많은 돈이 이 홈스테이비용에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을 채우길 때쯤 나는 영국의 렌트사이트로 유명한 굼트리(Gumtree)를 통해 중심가에서 다소 먼 곳에서 하우스셰어를 하기로 했다. 무려 원어민 홈스테이의 8분에 1 가격으로 말이다.


이후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뤄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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