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송'을 누르는 게 이렇게 떨릴 줄이야
요즘 삶이 무료하다. 매일 8시 반에 출근해 5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지루함을 느낀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일상에 지칠 때쯤이면 여행을 다니곤 했다. 3개월에 한 번은 혼자 해외로 떠나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나를 내던졌다. 국내보다 해외여행을 선호한 이유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돼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엔 두려움이 많은 겁쟁이지만, 이국 땅에만 가면 알 수 없는 용기와 무모함이 생겨 새로운 것들을 탐험할 수 있었다. 작은 일탈을 즐기며 에너지를 충전한 뒤 이후의 일상을 버텨내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면서 일상의 지루함이 먼지처럼 가득 쌓였다. 무료함을 날리기 위해 국내여행을 계획했지만, 며칠 전 축구를 하다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어떻게 하면 일상에 변화를 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문득 예전에 읽었던 책 '딱 1년만 나만 생각할게요'에 나오는 한 구절이 생각났다.
'사소한 일이든 대담한 일이든, 감정을 뒤흔드는 일을 저질러라'
나는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외쳤다. 매번 사는 게 똑같다고 투덜대지 말고,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은 감정을 뒤흔드는 일을 시도해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책상에 앉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다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소중한 사람에게 안부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20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인간관계가 점점 좁아지는 걸 체감하고 있다. 초·중·고, 재수생, 대학생, 기자를 거치면서 당시에는 둘도 없이 친했지만, 지금은 연락이 뜸해 관계가 소원해진 사람들이 많다. 이따금씩 생각이 나더라도 '일하는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그 사람은 나를 신경도 안 쓰는데 괜히 오버하는 건 아닐까'하며 연락을 주저하게 된다. 교류가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락을 하는 게 더욱 어려워지고, 결국 남과 다르지 않은 관계로 전락하고 만다.
이렇게 '흘러간 인연'이 된 사람들 중 한 명에게 문자를 보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전날 밤 꿈에 나왔던 J였다. J는 내가 중학생 때 다녔던 종합학원의 국어 선생님이다. 나는 당시 화목토 반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자전거를 타고 학원에 갔다. 처음에는 공부를 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선생님 및 친구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변질됐다. 특히 중2 때는 흔히 말하는 '중2병'에 걸려 수업시간에 친구들을 불러내 노래방에 가고, 청소년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하면서 방황을 했다. 학원 선생님들께 불려가는 일이 많았는데, 나중에는 혼나는 걸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다행히 중3 때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원하던 고등학교에 합격했는데, 이 모든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분이 바로 J다. 때로는 따끔한 말로 꾸짖으시고, 때로는 애정어린 말로 격려해주시면서 나에 대한 관심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으신 고마운 분이다.
J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건 무려 6년 전이다. 2014년 8월, 미국 어학연수를 가기 전에 학원친구와 함께 J를 만났다. 당시 J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중학생 시절을 나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구나'라고 느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소중한 추억 한 조각을 찾은 기분이었다. 카페에서 3시간 넘게 수다를 떨면서도 J에게 감사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다음에 만나면 꼭 말씀 드려야지' 했는데, 뭐가 바빴는지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말았다.
J에게 안부 문자를 보내기로 결정한 후 메모장을 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진심을 담아 최대한 진솔하게 작성하다 보니 생각보다 분량이 길어졌다.
몇 번의 수정을 거쳐 글을 완성하고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서 J의 이름을 찾았다. 메모장의 글을 대화방에 붙여넣기하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대면서 떨렸다. '혹시나 J의 반응이 뜨뜨미지근하면 어떡하지', '오랜만에 연락하는 건데 내용이 너무 오그라드는 건 아닌가' 등 걱정이 됐다. "에라 모르겠다"하며 전송을 누른 후 답장을 볼 자신이 없어서 PC카톡을 끄고 휴대폰도 덮어버렸다. '결과가 어찌 됐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행동한 건 잘한 일이야'라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또 위로했다. 몇 분 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J에게 답장이 와있었다.
"오랜만~~지금 수업 중이라 길게는 못 쓰고 반갑다~~현재 사진도 좀 올려줘ㅋㅋ"
다행스럽게도 J의 문자에선 반가움이 묻어났다. 아, 이렇게 간단한 일을 6년이나 미뤘다니. 지금이라도 문자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서로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당장 약속을 잡고 싶었지만, 최근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급증하고 있어 선뜻 만나자고 하기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얼굴을 보기로 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안부 문자 하나 보냈을 뿐인데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휘몰아쳤다. 지루한 일상에 신선한 바람이 살랑이는 기분이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동이 일어나듯이, 무료함을 느낄 때마다 감정을 뒤흔드는 일을 저질러 삶에 자그마한 변화를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작은 변화들이 모이면 인생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