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노 Jun 18. 2021

동유럽 한 달 퇴사여행으로 얻은 것들

여행 27일차: 마침내 긴 여정을 끝내다

2019.10.18 여행 27일차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 숙소 방에서 본 풍경
두브로브니크 숙소에서 먹은 마지막 조식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감은 뒤 방에 흐트러진 짐들을 가방에 넣었다. 짐은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도 나의 마음은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았다. 빨리 한국에 가서 가족,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과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이 곳에 좀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한데 뒤엉켰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브로브니크는 창문 사이로 푸른 빛을 내뿜으며 진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째 본 풍경이지만 이별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유독 예뻐 보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숙소 거실 테라스에서 조식을 먹었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다니카 할머니가 맛이 독특하다고 경고했던 커피를 한번 먹어보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갈색 파도가 출렁이는 커피잔에 얼굴을 비추자 뜨거운 열기와 함께 진한 커피 향이 치밀어 올랐다.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목구멍으로 넘긴 순간 달콤쌉쌀한 맛이 혈관을 타고 흘러 내 몸은 물론 두브로브니크에서의 추억까지 따스하게 적셨다. 

두브로브니크 숙소
두브로브니크 전경

그윽한 커피 향으로 물든 두브로브니크 숙소를 뒤로 하고 다니카 할머니의 체취가 담긴 차에 탔다. 공항으로 달려가는 30분 동안 다니카는 바람처럼 흘러간 30여 년의 세월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28세 때 남편과 사별한 후 홀로 자식들을 키웠다고 한다. 제 앞가림도 힘든 나이에 어린 새끼들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을 맞았으니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을까. 좌절, 괴로움, 외로움, 두려움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가슴속을 마구 헤집어 놓았을 것이다.


희망의 빛 한 줄기만 보고 칠흑 같은 어둠을 헤쳐나간 다니카는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며 마침내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평생을 일하며 살았으니 여생은 당신을 위해 보낼 법도 한데, 다니카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운영하면서 세계 각국의 자식들을 돌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손님들을 아들딸처럼 살뜰히 보살폈다. 매일 아침 끼니를 챙겨주고 집 안 곳곳을 깨끗이 쓸고 닦았으며, 늦은 저녁에는 숙박객들이 혹시 배고프진 않을까 직접 만든 음식을 잔뜩 내어 주었다. 내 집 같은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늘 바쁘게 움직였다. 가족 부양의 책임으로부터 성실과 근면의 DNA를 물려받은 듯 했다.  


밤낮 없이 정성을 쏟는 다니카가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에어비앤비 숙소 운영하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다니카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힘들지, 힘들어. 잠도 5시간밖에 못 자고 신경 쓸 것도 많아. 특히 여름에는 성수기라 너무 바쁘고 힘들어."  

"그렇게 힘드신데 왜 계속 운영을 하시는 거예요?"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을 대접하는 게 행복하거든. 그 행복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 지쳐도 하는 거야."

자기희생적 헌신과 사랑으로 가정을 지킨 다니카는 다른 사람을 품고 온정을 베푸는 데서 여전히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심지를 태워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양초처럼.

두브로브니크 공항

어느덧 두브로브니크 공항에 도착해 차에서 짐을 내렸다. 이제 다니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할 시간. 아쉬움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얼어 있었더니 다니카가 다가와 나를 포근하게 안았다.

"만나서 정말 즐거웠어. 다음에 남편 생기면 꼭 데리고 와."

"네, 다시 올게요. 가족처럼 잘 챙겨주셔서 감사했어요. 건강하세요!"

결혼 생각이 딱히 없기 때문에 남편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다니카의 집을 재방문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손 끝으로 전해진 다니카의 온기가 내 몸을 빨갛게 달궜다.

두브로브니크 공항
이륙 전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
비행기 안에서 본 구름

여행 첫 날 다녀온 프라하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길었던 한 달 간의 나들이었다. 나름의 장기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쳐서 뿌듯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30일 가까이 동유럽을 누비면서 세상에는 아름다운 곳이 참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 힘든 일이 생기면 내가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꿈꾸고 동경하면서 삶에 희망을 불어넣을 것이다.


여행이 끝난 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풍경보다도 사람이었다. 분명 한국에서 혼자 여행을 떠났는데 동유럽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양한 국적, 직업,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라는 양탄자를 타고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나 폭넓은 세계를 탐험했다. 서로의 인생 스토리를 나누면서 여행지에서의 추억은 더할 수 있었다. 낯선 나라의 차가운 공기를 훈훈하게 데워준 소중한 인연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지친 와중에도 매일 흰 종이에 검정 잉크를 묻혔던 나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꾸벅꾸벅 졸아서 글씨가 삐뚤빼뚤해져도 어떻게든 기록을 남겨서 두 권의 일기장을 가득 채웠다. 이 일기장은 현실에 치여 무기력해질 때마다 여행의 설렘을 상기시키며 삶의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든든한 보조 배터리가 되었다. 덕분에 몇 개월은 일상을 거뜬히 버텨낼 수 있었다.


여자 혼자 치안이 좋지 않은 유럽을, 그것도 한 달이나 간다고 했을 때 일부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나 또한 조금은 두려웠다. 소매치기를 당하지는 않을까, 버스에서 짐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기차를 놓쳐 일정이 모조리 꼬여버리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딱 감고 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결국엔 해냈다. 내 가슴 한구석에 있던 삶에 대한 열정과 도전 정신이 여행을 통해 심장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뭐든지 시작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것저것 재보지 말고 일단 해보자. 용기를 갖고 도전해보자. 안전한 어항 속에 갇힌 물고기가 아닌 깊고 어두운 바닷속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자. 그러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익숙한 풍경과 사람 속에서 감정이 무뎌진 채로 살기엔 인생이 너무나도 짧다. 아직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 마지막날은 현지인처럼 놀아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