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하이브리드
하이컨셉이나 로그라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미니 시리즈 아이디어를 떠올려 보셨나요?
아마 처음에는 잘 안 될 겁니다. 어쩌면 안 되는 것이 당연하고요.
제가 만든 클래스에서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미니 아이디어 부분에서 공회전만 열심히 하고 있는 수강생들이 여럿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겐 몇 달,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미니 시리즈의 시작 단계인 아이디어 착상 부분을 통과하지 못하고 클래스에서 하차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단막극은 극작술을 배우기 위해서 아무 이야기나 극본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미니 시리즈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시작부터 당선이 가능한 '끝내주는 아이디어'로 시작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미니 기획안과 극본을 제대로 쓰는 일은 많은 시간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단막 습작하듯 그저 그런 아이디어로 작업을 시작한다면, 어느 순간 스토리가 막히거나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발생할 확률이 99.9%입니다.
미니 시리즈에서 습작은 없습니다. 바로 실전이어야 합니다.
단막은 소재가 좋지 않아도 필력이 좋으면 뽑힐 수 있지만, 미니는 철저하게 방송에서 틀만한 아이템이 아니면 결코 뽑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극본이 완전 생초짜라 할 지라도 아이템만이 좋으면 뽑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미니 시리즈는 아이디어가 드러나는 첫 장 기획의도에서 당락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프로작가들은 기획의도를 세 가지로 분리해서 씁니다.
첫번째는 로그라인이나 하이컨셉입니다. 여기서 강력하게 후킹을 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잠시 뒤에 말하고, 세번째는 주제입니다. 내가 이 미니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씁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무엇일까요?
바로 캐릭터입니다.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가를 짧고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사위원은 기획의도를 읽어가면서 이런 판단을 합니다.
"오... 로그라인 괜찮은데? 게다가 캐릭터까지 좋아. 그리고... 그 둘을 통해서 이걸 말하고 싶다고? 대박!"
이런 심리의 과정이 없으면, 심사위원은 공모 지원자의 극본을 안 읽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극본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정말 열심히 썼는데 말이죠.
그래서 미니 시리즈는 아이디어가 좋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보통 프로작가들은 이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뭔가 죽인다고 생각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작업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와 드라마도 보고, 책과 신문도 읽고, 사람도 만나고 하면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찾습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아이디어를 찾게되면, 미니 시리즈의 절반이 끝난 겁니다. 그만큼 아이디어가 중요합니다.
제가 하이컨셉으로 아이디어를 만들고, 로그라인으로 아이디어를 만드는 법을 알려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다만,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방식에서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한 가지 더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이컨셉이나 로그라인으로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관점이 조금 다를 뿐이죠.
그것은 바로 기획의도의 두번째에 들어가는 '캐릭터'입니다.
최근 제작사, 방송사, 그리고 채널 등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은 다름 아닌 '차별화된 캐릭터'입니다. 이 차별화된 캐릭터는 배우를 꼬셔서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기도 합니다.
차별화된 캐릭터에 매력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캐릭터의 매력에 대해서는 제가 이전에 올린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공모에 당선되는 극본 쓰기 11 : 매력>
<공모에 당선되는 극본쓰기 12 : 매력 2>
그렇다면 차별화된 캐릭터는 과연 어떤 캐릭터일까요?
그것을 알아내는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방영되었던, 미니 시리즈 중에서 인상적인 주인공 캐릭터는 누구였는가를 내 스스로 판단해 보면 됩니다. 또는 내 인생의 영화나 드라마도 괜찮습니다. 단, 캐릭터가 로그라인을 압도하는 작품이어야 합니다.
가령, 오징어 게임은 캐릭터 드라마이기 보다는 로그라인 드라마입니다. 어린 시절 동심의 놀이가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에 이용된다는 것이 중요한 설정이니까요.
차별화된 캐릭터가 있는 드라마는 주로 제목에 주인공 이름이 들어가거나 직업이 들어갑니다. <힘쎈여자 도봉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요.
탐정물이나 시리즈 캐릭터는 모두 차별화된 캐릭터라 볼 수 있습니다. 셜록 홈즈, 미스 마플, 에큘 포아로, 괴도 신사 루팡 등 차별화된 캐릭터로 성공한 작품들입니다.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 24시 시리즈의 잭 바우워 역시 그런 캐릭터입니다. 수많은 시즌형 미드들이 바로 이 차별화된 캐릭터의 매력을 우려먹으면서 진행됩니다.
작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인생 캐릭터를 하나 갖는 게 로망일 정도로 캐릭터 문제는 중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그럼, 인생 캐릭터(불멸의 캐릭터까지는 아니더라도)는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요?
정답부터 말씀 드리면, 하늘에서 떨어지듯 뚝딱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캐릭터는 없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캐릭터는 없습니다. 다만, 새롭게 보이는 캐릭터만 있을 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새롭게 보이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것은 캐릭터를 하이브리드(이종결합)하는 것입니다.
하이브리드가 뭔가요? 이질적인 요소가 결합된 거 아닌가요?
하이브리드 캐릭터 = 본질 + 새로운 직업
예를 들어볼까요?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 화학선생 + 마약사범
<하우스>의 닥터 하우스 = 셜록 홈즈 + 의사
<하얀 거탑>의 장준혁 = 이카루스 + 의사
<힘쎈여자 도봉순>의 도봉순 = 취준생 + 초능력자
<굿 닥터>의 박시온 = 자폐아 + 의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 = 자폐아(또는 박시온) + 변호사
이런 식으로 주인공 캐릭터를 분석하고, 캐릭터를 하이브리드하는 게임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거다 싶은 캐릭터가 얻어 걸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캐릭터가 얻어 걸리면, 그 다음은 무엇을 해야할까요?
차별화된 캐릭터 = 캐릭터 하이브리드 + 디테일
디테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캐릭터만의 독특한 버릇, 사상, 결점, 시그니처 대사 등등.
이런 섬세한 요소들이 추가되어야 차별화된 캐릭터가 되는 것입니다.
가령, <굿닥터>의 박시온으로부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나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우영우 = 박시온 + 변호사
차별화 디테일 = 여자, 시그니처 대사(앞으로 해도 우영우 뒤로 해도 우영우...), 회전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등등.
이렇게 새로운(새롭게 보이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캐릭터로 로그라인을 만들고는 그 다음부터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공모에 당선되는 극본쓰기 13 : 감정이입>과 <공모에 당선되는 극본쓰기 14 : 감정이입 14>를 다시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위에 열거한 예들은 제가 이미 하이컨셉과 로그라인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방법에서 설명했던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이번에는 캐릭터를 하이브리드한다는 시점에서 본 것이고요.
결국, 이 세가지 방법은 한 가지 기획의도에 수렴되는 것인데요. 때문에 기획의도를 쓸 때 첫번째 로그라인(하이컨셉), 두 번째 캐릭터, 세번째 주제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다음과 같은 도식을 말씀 드린 적 있습니다.
스토리 = 캐릭터 = 주제
스토리는 로그라인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 캐릭터 밖에 없는 것이며, 그 스토리와 그 캐릭터에서는 그 주제 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제가 말한 미니 시리즈의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세 가지 방법은 결국 한 가지인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 방법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면, 나머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기획의도를 입체적으로 완성하는 것이 바로 정석입니다.
이렇게 미니 시리즈 아이디어를 찾는 법을 알아봤는데요. 왠지 다음 <원 포인트 레슨>은 기획의도를 쓰는 법이 될 것 같네요. ㅎㅎ
하이컨셉 갖고도, 로그라인 갖고도 아이디어 생성에 실패하신 망생이 여러분 이번에는 캐릭터 하이브리드 방법을 한 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 역시 처음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방구가 잦아야 똥이 나온다, 는 평범한 진리를 가슴에 품고 시도하고 또 시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