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나는 양자 역학에 대해 잘 모른다. 물론 리처드 파인만의 말처럼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겠냐마는 안 그래도 과알못이라 양자역학 이론에 대한 얘길 하기 위함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단지 양자 역학이 제시한 ‘확률로써의 세상’이 의미하는 바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보여준 시거의 동전 던지기(운명)와 비슷한 의미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시작한다.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코펜하겐 학파(양자 역학 이론 정립)의 주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니 몇 가지 명제를 정리해 본다.
1. 미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고전 역학 법칙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2. 미시계에선 관찰자와 그 대상을 구분할 수 없다(관찰하는 즉시 관여되고 결과에 반영)
3. 결정론적이지 않고 즉흥적(확률적)이다
내가 쓴 글에 자신이 없기에 닐스 보어의 말을 인용해 다시 한 번 정리한다.
닐스 보어: “기존 물리학의 발상은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은 확정되어 있는 상태이며 이것을 우리는 측정이라는 행위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측정하려는 주체와 대상이 분리될 수 없다”
(너무 작은 세계이기 때문에 관측 즉시 결과 바뀜)
잠깐, 정리!
닐스 보어는 양자 역학을 지지한 대표적 학자로 코펜하겐 학파 수장임
& 불연속적 세계관의(코펜하겐 학파) 대표 학자들 :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 연속적 세계관의 대표 학자들 :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 이 두 그룹이 벨기에에서 열린 솔베 회의(Conseil Solvay)에서 계급장 떼고 붙음. 참고로 이 솔베 회의는 세계 최초의 물리학 학회이며 1911년 이후 3년마다 열리고 있음
-> 결국 코펜하겐 학파가 이겼으며 실험을 통해서도 증명됨.
회의 중 빡친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함
1927년 제 5차 솔베이 회의(마담 퀴리도 보임)
내가 써 놓고도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이 불가해한 운동이 갖는 특이성이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운명의 부조리함 그리고 불가해함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단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다시 삶의 무의미함으로 변주해 다가오기도 한다.
숭고한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것 같은 인간 생이 어쩌면 무질서하고 무계획적이며 무의미한 확률의 펼침일 수도 있다니(양자 역학이 이런 나의 뇌피셜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허무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 때 내 삶이 엄청난 운명의 사슬로 엮여져 있을 것만 같다고(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또한 있었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생각은 희미해져 간다. 물론 비운명적이라 해서 삶이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하기에 그 의미를 스스로 구축하고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사고에 다다르면 한 때 철학적 화두를 독점하다시피 한 실존주의 사상을 스치게 되고 동시에 하이데거가 정의한 용어 ‘피투성’을 떠올리게 된다.
산다는 건, 나란 존재는 어떤 의지의 결과일까?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그 전제조건에 대해 더 이상 매달리지 않게 됐다는 사실이다. 나란 사람의 의미가 전제조건에 따라 달라지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나의 선택’의 결과라 믿고 싶기에...
물론 그럼에도 하이데거의 말처럼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세계 속으로 던져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불안이라는 친구를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안톤 시거가 사람들을 죽이기 전에 하는 ‘동전 던지기' 는 삶 속에서 보이는 무작위성의 잔인함을 은유하는 것 같다. 물론 소시오패스 킬러인 안톤 시거와 그가 쫓는 인물 간에는 ‘마약 밀매 현장에서 사라진 돈’이라는 매개체가 있지만 안톤 시거의 살인은 꼭 그 때문에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과 만나는 사람들(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래서 안톤 시거가 ‘죽음’을 은유한 인물이다, 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음)을 모두 공평하게 죽였다.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살인이 아니라 마치 죽음이라는 행위가 나타나기 위해 서사가 필요한 것처럼.
얄궂은 운명의 당사자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양자역학의 또 다른 영웅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일찍이 확률로써의 세상을 수학적으로 정리해 놓은 학자가 있었다. 코펜하겐 학파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기에 그들이 참고한 reference가 분명히 있었는데 그것들 중에서도 볼츠만의 업적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볼츠만이 정립한 통계역학이 이에 해당된다. 이 통계역학이 양자역학으로 계승되어 미시계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법칙이 ‘확률’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확률’ 이란 단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제 확률이란 단어를 뭐가 진실인지 아직 특정하지 못한 단계를 가리키는 용어로써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본성이라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어쭙잖은 나의 뇌피셜을 마무리 한다.
P.S. 비극적이게도 볼츠만의 통계역학은 살아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좌절한 볼츠만은 신경 쇠약을 앓다 자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묘비에 세워진 흉상에는 그가 정립한 통계역학 공식이 굳게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