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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섭 Feb 23. 2023

경험과 지식, 인격을 사고파는 서가

공간창직 워크숍_휴먼 라이브러리 큐레이터

"유명한 작가가 되어서, 작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해야지." 한때 이런 꿈이 있었다. "그럼 소문나고 한 명이라도 더 오겠지." "작가의 색깔을 덧입힌 특색 있는 장소를 만들 거야." "꿈과 이야기가 있는 하룻밤이 빛바랜 침대칸 보다 낫지 않을까."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시한부 환자처럼 언제 문 닫을지 모를 숙소를 향한 마지막 희망, 나름의 복안이 바로 '작가 게스트하우스'였다. 인생 2막의 한 복판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경험을 나눌 자신만의 '사랑방'을 열고자 한 것이다. 흔한 게스트하우스 파티는 못해도, 술과 유흥을 즐기지는 않아도, 글쓰기는 멈추기 싫은 어느 게스트하우스 운영자의 오기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명하진 않지만 누군가에겐 쓸모가 있을 거야"란 생각이다. 더 이상 멋진 책을 내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만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존재 자체가 '사람책'이 되게끔 스스로를 큐레이팅하기로 했다. 목적은 지금까지 써둔 글 한편 한편이 의미 있는 독자를 만나 '살아있는' 작품이 되고 그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휴먼 라이브러리란 "책 대신 특정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책'을 대여해 주는 신개념 도서관 서비스다. 독자들은 도서관에 준비된 사람책 목록 중에서 읽고 싶은 사람책을 골라 대출하고, 정해진 시간에 만나 자유로이 대화하며 정보를 전달받게 된다.(출처: 시사상식사전)" 도서관 생활자라 종종 다니는 도서관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나곤 한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나도 한번 신청해 볼까." 사람책이 되어 자신을 퍼 줄 수 있다는 개념이 뭔가 흥미로웠다. 최근 한 도서관에서는 '시민 큐레이터'를 모집한다는 글도 내걸었다. 시민이 직접 자신이 추천하는 책을 도서관내 한 서가에 모아 소개하는 것이다. 이런 개념에 창직가적 상상을 더해 만든 것이 바로 '휴먼 라이브러리 큐레이터'다. 큐레이터는 휴먼북을 기획하고 육성하며, 전시 공간을 만들어 사고파는 것을 도와준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 낸다. 기존 휴먼북이 주로 비영리사업으로 다뤄졌다면, 이 사업은 영리 활동도 포함한다. 돈이 되는 지식과 경험을 뽑아낸다. 누구나 스스로 책이 되고, 직업과 비즈니스가 될 수 있도록 장려한다.


AI가 대신 글을 쓰고,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큐레이션의 역할이 날로 커진다. 이전에 한 미술관 학예사(큐레이터)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담당하던 국제문화교류 업무로 해외 기획전을 도우면서다. 이때 큐레이터의 진면목을 봤다. 비록 전시 작품의 원본 작가는 아니지만 그 못지않는 전문성을 뽐냈다. 기획 의도에 맞는 작품을 고르고, 그 특성과 배경을 설명하고, 작품의 운송 및 배치, 보존까지 하나도 허투루 하는 것이 없었다. 여러 작가를 대변하고, CEO처럼 전반적인 전시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무엇보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 있어도 그 작가는 멀리 있지만, 큐레이터는 자기 눈앞에 '실제한다'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깊은 조예를 드러내고, 관객 저마다의 궁금한 내용을 현장에서 바로 답해줄 수도 있다. 이것이 열 작가 부럽지 않은 큐레이터의 역할이다. 박제된 많은 지식이나 어떤 화려한 솜씨보다 때론 더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지금 자기 앞에서 말해주는 한 사람이다. 자신의 상황과 감정, 개별적 문제를 이해하고 맞춤 정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격적 소통을 통해 개개인이 필요한 내용을 선별하고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 존재만으로 따스한 온기가 묻어나기도 한다. 이렇게 휴먼 라이브러리 큐레이터도 각 사람 안에 감춰진 가치와 잠재력을 발견하고, 글과 말, 만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가와 독자가 서로 직접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돕는다.


공간이 기적을 만든다.


이런 염원을 담아 게스트하우스 내 휴먼 라이브러리 설치 공간을 마련했다. 새로 무슨 일을 할 때 마음이든 장소든 먼저 비운다. 그래야 채워진다. 구조화된 공간에서 뭐가 더 필요한지, 얼마큼 진행 됐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다행히 게스트하우스를 하면서 공간만큼은 부자다. 몇 날 며칠을 먹고 자고, 놀만한 복합공간을 마련해 뒀기 때문이다. 숙박부터 모임까지 한 공간에 30-40명은 너끈히 들어간다. 휴먼 라이브러리 사업의 초기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바로 숙소를 이용하는 게스트들에게 호스트가 적어둔 브런치 글들을 공개하고 반응을 받는 것이다. 이 글들을 통해 소통하고, 더 관심 있는 주제는 유료 코칭, 강의, 기고 등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나가, 실물 책자를 놓을 오프라인 공간도 함께 마련했다. 여행자들을 위한 추천도서 코너를 만들고, 게스트들과 함께 하는 휴먼북 사업도 추가했다.


여기다 사업 안내문도 하나 만들어 붙였다.


사실 이 공간은 제 용도를 찾지 못하고 방치 되다시피한 서가였다. 입구 근처지만 약간의 지역 관광 홍보물 정도만 덩그러니 놓였을 뿐이다. 그나마도 여기저기 공간이 숭숭 비어 늘 채울 거리가 고민이었다. 이곳 외에도 숙소 내 더 큰 책장이 있는 별도 독서공간이 있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주인장의 취향이 반영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독서공간은 운영 초기에 만든 후 별로 활성화되지 못 했다. 숙소의 끝자리, 별실 안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별실 전용 공간에 더 가까웠다. 입구쪽 빈 서가 각 코너에 이름을 붙이고, 사업 현수막까지 만들어 달자 금세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존 독서공간에서 책도 몇 권 선별해 가져왔다. 아직 채울 것 투성이지만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았나. '작가 게스트하우스'를 향한 본격적인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게스트하우스에 휴먼 라이브러리'라니. 근데 좀 생뚱맞지 않나. 이 조합은 좀 더 '사람 냄새'나는 숙소를 만들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왔다. 아이러니하게 그 시작은 '무인화 숙소' 운영 계획이다. 코로나가 터진 뒤 한창 비대면 바람이 불었다. 여러 사람이 효율성을 위해 공간을 쪼개고 나눠 쓰던 공유 서비스 등이 우선 타격을 받았다. 게스트하우스도 그중 하나다. 이후 셀프체크인 등 비대면 서비스를 활성화안내사항도 최소화했다. 인사 나누기조차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운영자의 숙소 상주 시간도 자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호스트와 게스트 간 간격도 벌어졌다. 작은 불편에도 나쁜 댓글을 다는 경우가 늘었다. 코로나 이전 "주인장이 친절하다" 식의 댓글도 점점 줄었다. 시도 때도 없는 게스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는 더 힘들었다. 그렇다고 마냥 숙소 운영에 시간을 쏟아부을 수도 없었다. 시간도 자원도 에너지도 넉넉지 못한 1인 가족기업의 한계 덕분이다. 그래서 간단한 입실 안내 등은 아예 무인화하고 서비스 이용시간 등을 확실히 고지해 두기로 했다. 호스트와 게스트 간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다. 대신, 양자 간 휴먼 라이브러리를 열어 인격적 소통을 늘리고 공간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 힘쓰기로 했다. "싼 맛에 별 기대 없이 오는 곳",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방문객도 주인장도 설렘을 가지고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휴먼 라이브러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욱여넣었다. 이제까지 써둔 글도, 1인기업 아이템과 올해 숙소 운영목표도 각 코너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글이야말로 운영자의 삶과 일, 전 인격을 드러내주는 정수 중의 정수 아닌가. 글만큼 자신을 잘 소개하는 확실한 휴먼북 자료가 있을까. 사람과의 만남이 고프고 외로운 시대, 누구는 게스트하우스 파티에서 그것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교류'는 함께 하는 시간과 대화, 즐거움의 분량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을 뛰어 넘진정성을 요구한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의무적인 말 대신, 이제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쓰는 휴먼북을 통해서다. 호스트와 게스트가 '진짜 하고 싶은 말'로 소통하고 필요를 나누는 공간을 꿈꾼다. 휴먼 라이브러리가 숙소 어느 곳 보다 아름답고 영롱하게 빛나길 바란다. 누구든 공간이 있다면 한번 질러보자. 일터 빈자리나 마음 속에도 좋다. 사람 냄새 나고 나눌 수 있는, 돈이든 뭐든 스스로 작품이 되어 원하는 가치를 함께 엮어낼 수 있도록, 자신의 이름이 걸린 휴먼북을 쓰고 독자를 초대하자. 연재물을 잇고 라이브러리를 꾸미자. 그 1호 큐레이터는 물론 바로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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