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직글쓰기 시즌4의 서막
인생은 소설일까, 자기계발서일까. 물론 다른 장르를 붙여도 된다. 어느 쪽에 더 가까울지는 그것을 쓰는 작가 맘이니까. 우리 모두가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스스로 설계하고 써 나가는 '작가'라면 말이다.
이런 삶의 작가 정신을 잃을 때가 종종 있다. 40대 중반까지 다녔던 마지막 회사를 나오며 결심했다. "이제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겠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도 않고, 맘껏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오롯이 솟아나는 속사람의 소리를 따라 진짜 자신을 찾는 여정에 다시 오르는 것이었다. 거저 TV안에 유명인이 떠벌리는 대사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멋진 인생의 장면들을 꽉꽉 채우고 싶었다. 자기 안에 감춰진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훨훨 나는 것처럼. 하지만, 현실 속 자신은 어떤가. 또 어느샌가 땅으로 곤두박질 친다. 하늘을 나르던 이카루스의 날개 같은 숙명이라도 타고난 것일까. 자기 안에 날개란 애당초 없었던 걸까.
'다람쥐 챗바퀴'는 회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직장인을 벗고 반퇴자라는 새신분을 얻어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남아돌고, 오늘 하루 먹고살 빵 한덩이 걱정이 없어도 그렇다. 자유직업인으로 얻은 '자유'는 때론 사치다. 현실의 막막함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압도한다. 그럴 때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틀막'은 예사다. 자신을 위로해줄 다른 재미를 쫓아 이쪽저쪽 기웃거린다. 남의 이야기를 소비하느라 바쁘다. 자신의 존재는 그 씨조차 말라간다.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만 겨우 반복하며 하루하루 버틴다. 여름만 되면, 나는 어김없이 다람쥐가 된다. 휴가철을 맞아 밀려오는 숙박객 치닥거리로 깡충거린다. 조용하던 게스트하우스는 모처럼 여행자로 북적이지만, 운영자인 자신은 정작 한치의 여유도 없다. 휴가나 여행의 설렘은 까맣게 잊기 일쑤다. 숙소 청소로, 입실자 관리에 고객 응대로, 그저 챗바퀴 돈다. "혹시라도 건강에 무슨 문제가 생겨 쓰러지면, 오늘 오는 손님들은 어쩌지." 행여나 숙소 만실이라도 되는 날이면 마음 한편을 '나홀로 사장'의 무게가 짓누른다.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점차 해줄 이야기도, 쓰던 글자수도 줄어간다.
그렇다고 남의 이야기 듣는 게 마냥 나쁘다는 건 아니다. 소비는 생산적 욕구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얼마전(아니 2년전, 이 글을 쓴뒤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몇 안되는 오락 생활중 하나인 넷플릭스를 봤다. 어느 날 '100만 엔의 여인들', '척살 소설가' 같이 소설가가 등장하는 영화에 꽂혔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계속 쓰는 자로 살기 위해 소설을 써보는 건 어떨까"라는 원초적 궁금증이 생겼다. 여태껏 추구해왔던 자기계발서적 세계관이 붕괴되던 무렵이었다. 뭔가 다른 시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평생 답을 찾아헤메던 자기계발서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이것을 알기까지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근 20년이다. 대학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뭔가에 홀린 듯 자기계발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퇴직 직전까지도 주말 도서관 생활자를 자처했다. 이후에는 자기계발서 쓰기에 빠졌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창한 목적을 이루고자 정신 없이 뛰었다. 효율성을 앞세워 소설 따윈 읽을 시간 없음을 당연한 듯 살았다. 그때까지 자신을 있게 해준 소설 속 이야기들에 배은망덕했다. 반면,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땠나. 수백, 수십권의 세계문학, 한국문학 전집을 끼고 살았다. 부족한 형편에도 부모님 학구열 때문이었을까. 늘 주변 손닿을 만한 곳에 책이 있었다. 삼촌이 두고 간 외설 소설집, 빨간 맛까지, 알게 모르게 주변 책들을 깡그리 읽으며 심심함을 달랬다. 대학 진학시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문학 작품에 끌려 전공을 바꾸기도 했다.
폼나는 자기계발서가 어떤 때는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망친다. 실제 삶에는 늘 그런 자랑거리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서적 성취는 그 약발이 한시적이다. 승승장구할 때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실제 그럴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자기계발서라는 거대한 세계 안에서 한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다. 현실의 높은 벽을 체감한다. 알아도 할 수 없고, 해도 결과를 보기까지 버틸 인내가 바닥난다.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고, 무기력과 회의감에 몸서리 친다. 너무 높게 날아오르면, 떨어지는 골도 깊다. 마치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저 멀리 목표가 이제 자신을 옥죄고, 까맣게 태워버린다. 바라는 게 많다면 좌절도 크다. 자기계발서의 양면성이다.
4050 퇴직자의 효율성은 시간이 아니라 의미와의 싸움이다. 얼마나 진짜 원하는 목표를 찾아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끝까지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어쩌면 단조롭고 지난한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소설로 치면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반퇴자로 반백수처럼 3년 5년 살아보니 알겠다. 시간 낭비란 없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하고, 오락이나 무의미한 활동에 빠져, 그저 모든 시간을 흘려 보내기도 하지 않는가. 이것이 생활의 일부라면 어쩔 것인가. 그저 할 일이 있다는 것,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일이다. 코로나 때문에, 은퇴자라는 이유로, 커리어는 물론 사회와 단절되어, 그저 그렇게 꿈도 희망도 없이 살다가 나홀로 쓸쓸히 눈을 감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스스로 답변해 본다. "그럼 어때..." 한편으로는, 뭔가 다른 소리가 가슴 한 곳에서 애써 외면한 숙제처럼 슬그머니 올라온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이럴 때 자기 삶의 소설을 새롭게 쓸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
삶의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계발서적 성취나 목표 보다 사람 자체에 주목한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한걸음 한걸음을 귀한 이야기로 엮어 낸다. 주인공이 끝까지 그 여정을 완주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희망을 노래한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났다. 청소를 하다가 흘려 들은 한 유선방송 진행자의 VOD 선전 문구다. "우리가 영화에 끌리는 이유는 바로 나오는 주인공들이 한결 같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끝없이 도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소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인공은 외적 목표와 내적 변화라는 이중적 여정을 떠난다. 갈등과 결함을 극복하고,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대적을 물리친다. 여러 사건들 속에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 아니면, 소설이 될 수 없을 테니까. 처음의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승리다.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계발서의 획일적 틀을 깨야 한다. 이분법적 사고로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기 위한 제각각의 정답을 뽐내는 그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모두가 자신의 시간과 방식이 다 다르다. 자기계발서를 낼 만한 성공은 당장 못 하더라도, 자신을 오롯이 녹여낸 소설 같은 이야기 한 편 정도는 언제라도 마음만 있다면 쓸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소설의 역습이다. 소설은 마음을 다독여준다. 그저 상상하고 희망하며, 한걸음을 나가게 하는 단 한마디가 필요할 때가 있다. 소설이 그 역할을 한다. 목표를 향해 삶의 노를 저어 나가는 한 동력이 된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갈등을 딛고 결말을 보는 것이야말로 이야기의 핵심이다. 주인공의 시련은 멋진 작품 완성을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그것을 아는 작가가 어떤 극한 상황 속에도 희망을 가지고 글을 계속 써나가는 것처럼, 그것을 안다면 우리도 자기 삶의 소설을 끝까지 써나갈 수 있다.
자기계발서는 의지의 세계다. 반면 소설은 상상의 세계다. 의지는 무한하지 못하고 가끔 오작동하며, 제풀에 지치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상상은 한계가 없다. 자기 안의 무궁한 세계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상력이 저절로 그 꿈꾸던 세계로 인도해줄 것이다. 아무리 높이 날아올라도, 목표의 끝인 태양까지 솟아오르더라도 녹아 떨어지지 않는, 뼈 속까지 튼튼한 날개란 바로 상상력이다. 소설 속 희망과 믿음, 이 순간을 즐기고 살아내는 것, 목표를 향해 최후 승리를 믿으며 한걸음씩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그럴 때 소설 같이 발동한 상상력은 답답한 현실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해나갈 힘이 되어줄 것이다. 어떤 작가의 말처럼 "소설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고 삶의 소설에 있어서도 그 정신은 유효하기 때문이다.
한때 "소설 쓴다"는 말을 꽤 들었다. 물론 칭찬이 아니었다. 흔한 현실주의자의 비아냥거림, 뜬구름 잡는다는 말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어쩌면 그때가 가장 의욕적일 때였다. 설레고 들떠서, 말만 앞섰을지 몰라도, 행복한 꿈을 꾸며 나아가고 있었다. 이야기를 막는 것은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 아니다. 궤도 밖 세상을 향한 자기 안의 꿈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꿈을 되살리는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면, 이제 어떤 소설이라도 써보고자 한다.
아무나 소설가가 될 순 없겠지만,
누구나 자기 삶의 소설을 쓸 수 있다.
이야기 쓰기를 끝까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P.S. 소설쓰기 덕분일까. 2년간 서랍에서 잠자던 이 글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AI 소설쓰기 모임을 만들고 첫 단편소설을 뽑아내자마자, 막혔던 글쓰기 체증이 내려가 듯 다시 삶을 써내려가고자 하는 소설가적 열망이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