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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솔 Oct 24. 2022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한 인격체의 탄생을 바라보면서

요새 열두 살 된 딸아이의 짜증이 부쩍 늘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아진 걸 알았다. 예전에는 못마땅한 경우 입술만 삐죽 내밀고 말았는데, 이젠 목소리를 높이면서 버럭하고 짜증을 낸다. 주말에 가족 외출을 하자고 해도 나가지 않고 혼자 집에 있는 걸 선택했다. 나가는 게 귀찮다는 이유. 오지선다 중 서로에게 가장 별로인 답을 기꺼이 선택하고 마는 아이에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요즘 한창 가을볕이 좋아서, 아이와 함께 파란 하늘을 보며 걷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그저 엄마의 입장일 뿐. 아이는 날씨가 어떻든, 계절이 어떻든 상관없는 듯 무심했다.




아이의 부정적인 반응에 애가 사춘기라서 변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려던 차에 순간 이런 반응이 뭐가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처음엔 아이가 보낼 '문제'의 시기를 잘 보듬어주리라는 생각뿐이었다. 엄마의 눈으로 바라본 아이의 모습은 충분히 못마땅하니까. 충분히 부정적이니까. 아이보다 더 큰 그릇을 가진 어른으로서 아이를 잘 안아보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이를 키워오면서 매 순간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먼저 짜증으로 말하던 사람은 누구였더라? 내가 내는 짜증과 버럭은 인식하지 못하고 당연해하면서, 지금까지 고분고분 대응하던 아이가 이제와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건 잘못된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아이도 지금까지 참 많이도 참았다. 지금보다 훨씬 신경질적이고 짜증을 잘 내던 나를 오랜 시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으니.



사춘기란 나를 바깥으로 표출하는 통로를 발견하고, 서툴러도 나를 표현하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부모가 만들어 준 울타리 속에서 자라다 경계를 넘어갈 수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시기.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나를 표현하는 게 서투른데, 이제 막 첫걸음을 떼는 아이는 얼마나 어렵고 생소한 일일까. 처음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방법은 오로지 울음이지만, 점차 아기가 자라면서 웃음도 짓고 말도 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줄 알게 되는 것처럼,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도 비슷하다. 부모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한 인격체의 탄생.



사춘기 때 보이는 소위 어둠의 그림자 같은 모습은 어쩌면 서투름의 표현이다. 하나의 인격체로 독립하기 위해 연습하는 시간. 그러니 스스로도 혼란스럽고 답답하겠지. 다 싫을 수도 있겠지. 이런 시기를 겪고 있는 아이를 진심으로 격려해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아이가 하루아침에 바뀐 것도 아니고, 갑자기 성격이 나빠진 것도 아니다. 아이는 묵묵하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아이가 스스로 지나가야만 하는 문을 통과하는 것. 그 길을 지나고 있기에 엄마인 나는 아이의 어떤 모습에도 아이를 향해 사랑의 레이저를 쏴주겠다고 다짐한다.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걱정을 거두겠다고.

내 기준으로 결코 너를 판단하지 않겠다고.

오직 사랑으로 품을 내어주는 엄마가 되겠다고.



행여나 네가 오지선다 중에 가장 별로인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그 시기엔 그럴 수 있음을 그대로 인정해 볼게. 네가 선택한 그 마음을 엄마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니. 엄마도 마음속에서 백번도 더 선택해보고 싶던 답일 수 있으니까. 너의 행동으로 너를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을 거야. 너는 엄마에게 조건으로 사랑받는 아이가 아니니까. 너의 존재함이 그대로 완벽한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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