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은. <스노볼 드라이브.> 민음사
인류의 멸망을,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현실이다. sf판타지 속에서 등장하던 의문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친다는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전 세계를 급격한 변화와 혼돈으로 몰고 간 바이러스로 인하여 어느 때보다 우리는 혼란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들은 어떤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스노볼 드라이브 역시 디스토피아 sf소설이다. 바이러스가 아닌 ‘녹지 않는 눈’이라는 설정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꽤나 신선하다. 어느 날 내리기 시작한 녹지 않는 눈은 피부에 닿으면 발진을 일으킨다. 녹지 않기 때문에 태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눈을 처리하기 위하여 백영시는 폐기처리시설이 들어서고 다른 도시와는 단절된 무법 도시가 된다.
주인공은 평범한 중학생이었던 모루다. 엄마와 이모와 함께 살아가는 모루는 갑자기 내린 재앙으로 많은 것이 바뀐다. 때로 모루는 생각한다. 많은 것이 바뀐 사회에서 내가 선택했던 일을 되돌릴 수 있을까.
-92쪽-
지금에 이르러서야 생각해 본다. 센터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달라졌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있고, 우리는 그저 휩쓸릴 뿐이다.
때로 우리는 변화를 위해 발버둥 치고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상상하며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모루처럼 현실을 인정하고 휩쓸리는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화도 필요하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소위 말하는 ‘흙수저’, ‘헬조선’이란 용어 역시 휩쓸리는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내는 사회적 용어가 아닐까 싶다.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흐름 속에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개성이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부품처럼 살아가는 삶은 안락하다. 이러한 안락함은 ‘변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모루 역시 그랬다.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것만 같은 삶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모의 실종사고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185쪽-
죄책감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서 자꾸만 이월을 다그치게 된다. 밑바닥에 박힌 유리조각처럼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나를 아프게 찌른다. 빼내려면 바닥에 주저앉아 내 가장 밑바닥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잘 빠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내 신체의 일부가 되어 곪아 갈지도 모른다. 죄책감은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는 걸까? 나는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망한 세상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면 좋은 것들만 생각하고 싶다.
아마 모루는 이월을 만나며 ‘평범’함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반항적이었던 중학생 때의 향수를 지닌 이월은 모루의 상상을 품어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휩쓸리고 있는 삶에서 잠시나마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숨구멍 같은 자아의 한 조각. 그렇기에 모루가 느끼는 죄책감이 많이 아프다. 평생을 함께했던 진짜 자신의 뿌리인 이모의 존재가, 든든했고 강인했던 이모가 녹내장 판정으로 약해지는 모습이 마치 자신이 무너지는 것만 같아 아프게 외면했던 과거를 못 본 척하고 진짜로 묻으려 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모멸감은 모루가 이월에 대한 애정과 설렘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끝에 그들이 찾아 나서는 이모는 어쩌면 만나지 못할 것이란 것을 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둘 다 일탈을 맛보는 여행을 찾아 나선다. 표면적으로는 잃어버린 이모를 찾아 나서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온전히 그들만의 시간을 누리기 시작하는 첫 발걸음.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선택받아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다. 오늘의 작가가 바라보는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이제까지 불완전했던 삶을 주체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함께 여행을 떠나는 소설 속 모루와 이월이 풍기는 동성애적 요소부터 한부모 가족과 재혼 가정, 빈부의 격차가 극명하게 벌어지는 두 주인공의 배경에서부터 ‘스노볼’이 상징하는 외면적으로 완벽한 단절된 세상의 이중성까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을 되돌이켜 보게 한다.
그들의 여행은 결국 어떻게 될까. 모루 곁에 있는 이월의 뜻이 봄이라는 작가의 말로 둘의 행복한 결말을 바란다고 작가는 말한다.
녹지 않는 눈이 내리는 세상,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바이러스와 해를 넘겨가며 싸우고 있는 현실. 무엇이 더 소설 같은가. 드라이브라는 그들의 여행처럼 이 현실의 탈출구가 있다면 좋겠다. 우리들의 요즘이, 우리들의 오늘이 모루와 이월의 설레는 새로운 시작처럼 희망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