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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랑 Jan 18. 2022

우주를 이루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천선란. '천 개의 파랑'. 허블. 

“눈물은 빨리 마른다.”     

서양의 속담이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효과가 강렬하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호소력 짙다.’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다. 논리적이기만 해도, 감정에 매달리기만 해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이야기가 어떻게 '호소력'있게 다가갈 수 있을까. 머리로, 마음으로 울리도록 하는 일. 서사와 감정을 버무려 온몸으로 몰입하게 하는 일, 바로 문학이 해내는 일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불편한 미술관」에서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미술 작품 속 인권을 다뤘다면 미래 사회를 상상한 SF소설을 통해 만나게 될 인권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단순히 인권이란 말로 이 소설을 표현하기에 이야기의 깊이와 폭이 매우 넓고 깊다. 작가는 사회적 시선과 함께 친근하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개개인의 삶을 따듯하게 바라본다. 지금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빛깔로 묘사할 수 있는가?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이다.           




소설의 배경은 멀지 않은 미래다.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일상생활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 위험한 화재사건 현장에 소방관과 함께 인명구조 로봇 ‘다르파’가 출동하여 위험한 붕괴 위기 건물에서 인간을 구하고 라식 수술은 일반 보험처리가 되어 안경 쓰는 것이 매우 드물고 특이한 일이 되는 정도다. 경마라는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인간 기수 대신 기수 로봇을 사용하고 인간들은 기록에 따라서 말의 몸값을 매긴다. 휴머노이드 로봇과 단순 길거리 청소로봇이 늘고 의수, 의족 기술이 늘어 안정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사회. 거리 청소나 기타 잡일을 해낼 수 있는 로봇이 보편화된 일상.     


그러나 휠체어가 움직이기 위한 원만한 경사로와 도로는 여전히 정비되지 않았고 다르파의 대수를 늘리느라 소방관의 낡은 소방복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아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이 질식사하고 만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최저임금이 만 오천원이 들지만 휴머노이드 로봇을 이용하면 더욱 저렴하고 더 뛰어나게 시설 관리를 할 수 있어 아르바이트생이 줄고 로봇이 대신 계산대에 존재하게 된다. 소아마비는 의족을 활용해 거의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의료 기술은 발전하였으나 보험처리가 되지 않아 가정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지원받을 수 없없다.     



기술은 발전하였으나 그에 따른 복지와 기본권의 충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여전하다. 인간의 지능과 감성을 갖게 되는 로봇들의 권리까지는 너무 멀게 느껴지지만 소설의 시작이 바로 휴머노이드와 동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잠시 ‘지금’의 우리의 실상과 멀지않은 미래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왜 말을 타고 달리는 경기를 열게 됐나요?”

...

재미있으니까.”

민주는 내뱉어놓고 시시한 답변이라고 생각했으나그 이상의 적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재미가 없었다면 애초에 경마는 사라졌을 거였다경마가 몇천 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단연코 ‘재미’ 일 테니까

누가요말이요?”

아니인간이.”

인간이 재미있는데 왜 말이 달리나요그럼 인간이 달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p. 22-23 중에서-              



경주마로서 혹사당했던 투데이는 더 이상 쓸모없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당할 위험에 처한다. 투데이를 다시 살리게 하기 위한 과정에서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며 집안에만 있어야 했던 은혜가 외면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아픈 언니와 아빠의 빈자리로 너무 빨리 어른 아이로 자라나며 포기해야 했던 자신만의 꿈을 이루어내는 연재의 성장이, 소방관이었던 남편을 떠나보낸 후 세 명의 삶을 살아내느라 자신의 시간을 돌보지 못했던 두 자매의 엄마 보경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가 있다.           


경주마 투데이와 콜리는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이어나가는 중심축이다. 특정한 사건에 의해 성격과 가치관이 변화하는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투데이와 콜리의 삶은 연재, 은혜, 보경 세 가족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계기가 된다. 투데이는 그들에게 공통된 삶의 목표로서 공감과 소통의 계기가 되고 콜리는 관찰자이자 촉진자로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와 서사의 구심점으로 이끄는 힘이 된다. 변하지 않는 캐릭터가 주인공들을 변화시킨다는 점, 의미있지 않은가?



기존에 나왔던 다양한 SF소설에도 휴머노이드 로봇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 다른 여타 휴머노이드 소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콜리는 로봇이기에 인간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세상을 직접 겪고 지켜보며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람들의 삶을 직관적으로 살핀다. 이러한 콜리의 시선은 다른 여타 소설과의 특징을 만든다.


여태 로봇은 인간이 창조해낸 생명체였으며 일종의 미완성된 존재였다. 인간을 향한 선망, 혹은 무한한 애정, 복종. 그 안에서 로봇은 자라나고 점차 신과 같았던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스스로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으로 괴로워한다. 혹은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하나의 소재나 사건으로 로봇이 다루어졌다면이 소설에서는 한 ‘존재’로서 로봇, 콜리를 다룬다.      


콜리는 로봇이기에 인간과 거리를 두고 세상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멈춤’과 ‘경청’의 태도로 인간의 서사를 지켜본다. 조용히, 여타 다른 오해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콜리의 시선이 우리들에겐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진다. 가까운 가족이어도, 친구라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일상에 휩쌓여 우리는 서로의 본질을 자주 놓친다. 이런 오해와 사건 속에서 콜리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빈틈과 결핍을 채워준다. 이렇듯 흔들리지 않는 담담한 콜리의 시선에서 보경은 위로받고 잊었던 자신의 시간을 돌보게 된다.     

 

“... 다르지, 달라.”

그렇다면 인간은 함께 있지만 모두가 같은 시간을 사는 건 아니네요.”

“...”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뿐 모두가 섞일 수 없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맞나요?”

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감기 탓인지 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콜리가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284-               


애초에 불완전함이 기본값인 인간이 만들어낸 로봇이 완벽할 리가 없다. 우리는 각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서로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며 이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삶이란 없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 아니다. 인간과 로봇 사이에 우월함과 미숙함, 완벽함과 일방적인 배움이란 도제 관계가 아니라 각자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공상과학소설의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은 좋은 공상과학소설은 인간의 문제와 상황을 다뤄야 한다고 지적했다사건이 지구 가운데서 벌어지든 멀리 떨어진 우주에서 벌어지든 설정은 픽션이어도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픽션은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을 드러낸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로널드B. 토비아스 지음김석만 옮김' 중에서-        

       

SF소설은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한다. 허구의 상상이기에 무엇보다 현실적이고 인간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재다 「천 개의 파랑」은 공상과학 소설이면서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 초점을 두어 성장, 변화를 자세히 묘사하였으며 서로의 관계가 촘촘하게 이어진다. 소설의 이야기 중심축의 관계가 인간뿐만 아니라 휴머노이드로 상징되는 과학기술, 동물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 기술의 발전 방향으로 미래의 비전까지 이어진다.      


앞서 머리와 마음을 울리는 문학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성과 감성을 울리며 흠뻑 소설에 빠져들게 하는 저자의 스토리 전개와 섬세한 감성 표현, 더불어 사회적인 시각까지 모두 따뜻하게 다뤄낸 이 소설은 무슨 장르라고 소개해야 할까. 책날개 앞에 소개된 작가의 말을 다시금 읽어보며 콜리가 바라봤던 천 개의 파랑을 떠올려본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작가적 상상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늘 고민했지만언제나 지구의 마지막을 생각했고 우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꿈꿨다어느 날 문득 그런 일들을 소설로 옮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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