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깨어났다. 약간 골치가 아프긴 했지만 그냥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대만에서 너무나 말짱하게 살아남았다. 순간 내가 대만에서 뭐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 기억력을 상실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자살을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내 사진이 정말 잠시 한심스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난 생각을 바꾸어 먹었다.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고.
난 지갑에 있는 돈을 털어 가지고 있는 돈을 세어보았다. 복권에 당첨된 후 원룸 월세를 두 달 미리 내고 남은 돈으로는 근처에 두어 개 정도의 나라를 더 다녀올 수 있을 듯했다. 대만은 이제 물 건너갔으나 죽을 수 있는 다른 곳을 생각해 봐야겠다.
머릿속에 처음 들어온 생각은 방콕이었다.
방콕이란 곳은 공교롭게도 죽기 전에 한번 가보고 싶은 버킷리스티이기도 했고 거기에 가면 모든 약이든 다 구할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뒷골목을 걸어 다니다가 운이 좋으면 칼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그럼 자살한 사람이 아니라 여행하다가 마피아에게 죽은 한국사람으로 소문이 나서 나름 동정심도 유발할 것이다, 그냥 장기만 털리는 것이 아니라면....), 콘돔을 쓰지 않는 남자를 상대하다가 성병에 걸린 매춘부들과 관계를 맞다가 에이즈나 매독 같은 것에 걸릴 수도 있고... 그런데 그건 너무 천천히 죽는 데다가 치료법도 잘 나와 있다고 하니 효능이 얼마나 좋은지는 알 수 없다. 길에서 파는 불결한 음식을 먹고 식중독으로 순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선은 방콕에 가보기로 했다. 방콕이 나의 마지막 여정이 되느니 만큼 내가 가진 돈을 모두 털어서 나름 비싼 티켓을 샀다. 죽기 전 이렇게 한번 호사를 부려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비행기 타기 전 라운지에서 즐기던 와인과 음식 맛도 기가 막혔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두고 세상을 떠야 한다니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으나 이런 반짝하는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이런 즐거운 시간이 지나면 다시 거지 같고 암울한 날들이 시작될 거니까.
게다가 비행기표를 사는 데 돈을 탈탈 털어 다 써버렸으니 난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해서는 방콕에서 죽어야 한다.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일등석은 아니었지만 꽤 좋은 자리였다. 아리따운 태국 여승무원들이 샴페인을 가져다주었고 잔을 다 비우자 비행기가 이륙준비를 시작했다. 길가 신호등에서 줄지어 서있던 자동차들처럼 활주로에서 내가 탄 비행기가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고 난 하늘을 오를 때 벅차오르는 그 중력의 힘을 언제쯤 느끼게 될지 기대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달달 거리며 앞으로 향했다. 달달거리는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나지막한 북소리 같기도 했다. 드디어 자리를 잡은 비행기는 모터를 세게 돌리며 이륙을 시작했고 힘차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달달거리는 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공중으로 약 100미터쯤 떠올랐을 즈음에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소리를 쳤다.
"모터에 불이 붙었어요!"
"비행기에 불이 났어요!"
"어떻게든 해봐요!"
중국어와 영어가 섞여있었지만 내가 알아듣지는 못해도 이런 상황이면 다 저런 말을 하며 소리를 지를 것이다.
우왕좌왕하며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승무원들은 손님들 사이로 비집고 다녔다. 그런데 아무리 교육받은 승무원이라고 해도 얼굴에 두려움은 지울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하라고 하는 게 어폐 아닌가?
"여러분, 오늘이 여러분의 마지막 날입니다. 모두 부처님이건 예수님이건 당신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하세요!"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어디든 유서를 작성하세요. 앞 의자시트건 창문가건 다 좋습니다. 여러분이 타 죽어도 좌석번호로 신상 파악은 가능합니다!"
"죽겠다고 지랄들 하지 마시고 산소마스크나 쓰세요,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기능이 있거든요!"
속으론 이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인지도 모른다.
불이 붙어 연기가 나는 모터는 내가 앉은 앞줄에서도 잘 보였다.
정말 죽음의 순간이 오는 것인가? 이렇게 비행기에서 죽게 될 줄은 몰랐는데... 대만에서는 그 이상한 약 때문에 실패를 했지만 이번처럼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정말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을 귀한 일이지 않은가, 나는 차분히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참으로 멋있는 죽음이다.
마음을 잡고 앉아있는데 기장으로부터 안내방송이 나왔다.
"승객 여러분, 엔진에 불이 붙었지만 저희 기체는 안전한 상황입니다. 모두 진정하시고 자기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타이베이 공항으로 회황하겠습니다."
아니, 이게 웬 말이냐는 말이다. 사람들은 안전벨트를 차고 기장의 능란함에 기대를 갖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순진한 아이처럼 앉았다. 나는 혼자서라도 일어나서 말도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다.
착륙은 아주 순조로웠다. 비상착륙을 했는데 선반에서 짐을 꺼내겠다고 꾸물대는 사람들 때문에 큰 실랑이가 있었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었으면 뒷자리 사람들이 다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비상구를 통해서 긴급대피도 해보았다. 나름 재미도 있었다. 한번 더해 보고 싶었다.
덕분에 나는 타이베이에서 며칠을 더 묵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곳을 방문할 수 있을 정도의 보상금도 받게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자살하기에 정말 좋은 곳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더 주는 것 같았다. 돈이 많아지만 제대로 죽을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진다.
정말 죽어야 할 사람은 어떻게 해서건 죽게 돼있는 것 같다. 만약 방콕에서 죽지 못하면 필리핀으로 가면 되고 필리핀에서 죽지 못하면 베트남으로 가면 된다.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허락받은 것이다
어찌 되었건 나는 다시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고 비행은 계속 순항이었다. 난기류를 만나 덜컹거리는 일도 없었다.
거대한 도깨비 같은 형상을 한 거인이 손님을 맞는 방콕 공항에 발을 내디뎠다. 아주 더웠다. 시신이 금방 부패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