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옳은 건 없다.
아내가 산 책이 눈에 들어왔다. 열어보니 반듯하게 자를 대고 그은 밑줄과 무언가를 정리한듯한 메모가 군데군데 있었다. 밑줄이 그어져 있으면 좀 더 신경 써서 읽게 되는데, 몇몇 군데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보기에 중요하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은 부분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처음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읽었는데, 읽다 보니 그런 뜬금없는 밑줄이 한 둘이 아니다. '뭐야.. 나랑은 생각이 많이 다른 건가?' 생각하면서 그냥 다시 꽂아 두었다.
몇 달이 지나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전에 내가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는데, 비뚜름하게 그은 줄과 약간의 끄적거려놓은 흔적이 있었다. 자연스레 그 부분으로 시선이 갔고, 난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여기 왜 줄이 그어져 있지?' 대충 그어진 게 분명 내가 친 밑줄인데 그 내용에 동의할 수 없었고, 왜 밑줄까지 그었는지는 더욱 납득할 수 없었다.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그러려면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는데, 지금 서점에서 이 책을 봤다면 안 읽었을 책이다. 그러고 보니 십여 년 전쯤엔 이런 글에 자극도 받고 불안도 느끼며 살았던 것 같다. 그간 생각이 많이 변했다. '너무 애쓰지 말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행복들을 찾아서 즐기며 살자'가 내 태도인데, '치열한 삶'이라니.
그때 아내의 책에 그어져 있던 밑줄이 생각났다. '그래, 내가 그은 밑줄도 시간이 지나서 보면 이해가 안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그은 밑줄은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거지.'
같은 사람도 처해있는 상황과 맥락이 달라지면 생각도 변한다. 아주 잠깐 사이에도 맥락은 변할 수 있다.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 다르고, 화장실이 급할 때, 일 보고 나올 때, 돈 있을 때와 없을 때, 추울 때와 더울 때, 가까이 있을 때, 멀리 있을 때... 언제나 옳은 건 없고 그래서 역지사지가 필요하다.
나도 언젠가는 우연히 아내가 밑줄을 그었던 부분에 격하게 공감하며 밑줄을 다시 그을 수도 있다. 서로 통한다 하겠지만, 어쩌면 그땐 아내가 내게 물을 수도 있다.
"아니 여기 왜 밑줄을 그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