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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긴믈 Apr 11. 2020

貳. 신석기시대 ㅊ

신석기시대의 주거

신석기시대의 주거는 터를 굴착하여 지하에 상을 마련하는 수혈주거로, 일종의 지하 혹은 반지하식 주거이다. 바닥은 다양하게 마감했는데, 맨땅을 그대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진흙을 다지거나 조가비를 평평하게 까는 등의 사례가 확인된다. 진흙을 다지는 경우는 열을 가해 단단하게 만드는 불다짐처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주거의 평면 형태는 대개 원형에서 방형으로 변하는데, 지역별로 전개 과정은 조금 상이하다. 즉슨 원형계 주거는 타원형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방형계 주거지는 장방형이나 말각방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간혹 방형에서 원형으로 전개하는 양상이 보이기도 하지만 매우 특수한 현상이다. 지하를 굴착하여 흔적이 남은 주거의 출입구는 크게 계단식과 돌출식이 대표적인데, 전자는 주거지 외연 밖으로부터 계단을 파내려가는 방식이고 후자는 주거지 외연으로부터 밖으로 출입로를 길게 빼내는 방식이다. 돌출식 출입구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데 최초에는 반월형이었다가 점차 사다리꼴이나 가는 직사각형으로 변해가는 현상이 포착된다. 이외에도 경사면을 만드는 방식이나 지면을 굴착하지 않고 지상시설로 출입구를 마련하는 경우도 확인된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여러 형태


바닥 내부에 주거 공간구성의 중심인 노지가 확인되는데, 불을 놓는 화덕자리인 만큼 주거 내부 경관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바닥 가운데에 1개소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중앙에서 다소 벗어난 지점에 설치되기도 하며, 화덕의 수도 많으면 5개소까지 설치되기도 한다. 노지의 평면형태는 주거의 평면형태와 변이 양상이 유사하여, 최초 원형이나 타원형을 띠다가 점차 방형이나 장방형으로 변한다. 노지 외에도 바닥에 시설되는 구덩이가 있는데, 이것은 대부분 저장시설로 생각된다. 저장구덩이는 식료를 저장하는 공간으로, 화덕 근처에 있거나 주거지 외연 혹은 주거 밖에 시설된다. 저장구덩이 중에는 폐기된 토기를 활용하기도 하는데, 토기의 저부를 제거한 뒤 거꾸로 묻어 저장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이다.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기둥구멍의 배치를 통해 주거의 외연과 공간구성을 짐작할 수 있다. 꽤 다양한 형태의 주거가 있지만 일관된 변이 과정을 정리할 수도 있다. 즉슨 주거는 평면형태의 변화에 따라 지붕이 원추형 혹은 원뿔형에서 양면경사 혹은 방형경사로 바뀌며, 지붕이 바닥에 닿아 외벽과 지붕이 구분되지 않는 천막형에서 외벽과 지붕이 분리되는 발전된 형태의 가옥으로 변이하게 된다. 주거는 칸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극히 드문 사례에서 내벽을 시설하여 칸을 나누는 경우도 확인되었다.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흔적이나 유물 분포를 통해 주거 내 공간구성을 짐작할 수 있는데, 화로를 중심으로 생활·취사·작업·의례·저장 등의 특수 목적을 가진 공간들이 따로 있었다는 것 외에는 시공간을 관통하는 통일성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각각의 주거들은 적게는 수 동에서 많게는 수십 동까지 군집을 이루어 취락을 형성한다. 이것은 자연취락으로서 가족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하는 혈연집단으로 구성되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취락의 공간 내에서도 특정한 공간분화가 확인된다. 주거기 밀집한 지역에는 중앙광장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는 축전이나 제전, 석기 공동제작과 같은 활동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공동의 저장시설이나 토기제작장은 주거공간으로부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신석기시대의 취락은 계절에 따라, 혹은 생계에 따라 정착과 이주를 적극적으로 오가면서 흔적을 남겨왔다. 그리하여 파악된 취락과 주거의 성격은 장기거주·절기구거·단기거주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편 취락과 별개로 구축되는 주거 관련 유구도 확인되는데, 패총 내 주거·동굴·바위그늘 등은 특정 목적을 띠는 일시적인 주거였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주거의 가구 복원도


신석기시대인들의 마을은 신석기시대 중기에 다량 발견되었다가 후기와 말기를 지나면서 점차 규모가 줄어들며 해체되는 수순을 밟는다. 중기가 되면서 마을이 전국 각지에서 다량 형성되는 것은 곡물 재배와 같은 생계의 변혁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시대 마을의 해체는 청동기시대 마을의 등장과 맞물려 일어나는데, 그 배경은 아직 알 수 없다. 중기 마을의 규모는 10~20동 정도로 상정되며, 후기에는 3~5동 정도로 줄어든다. 마을의 입지는 대개 강변 충적지에서 많이 확인되지만, 후기로 가면 강변 충적지로 자리를 옮긴다. 대동강 유역에서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대형 주거지가 확인되는데, 이것은 개인의 주거공간이라기보다는 마을 공동시설일 가능성이 있다.



구자진, 2007,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집자리의 지역권설정과 변화양상」, 『한국신석기연구』 13, 한국신석기학회.

신종환, 2017, 「한국 신석기시대 사회 문화상 연구」, 박사학위, 경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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