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의 분묘
정주생활이 시작된 신석기시대에는 다양한 장법과 무덤이 등장하게 되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흙을 굴착하여 공간을 마련하는 토광묘와 토광에 시신을 담은 항아리를 묻는 옹관묘 등 인공적으로 매장공간을 형성하여 분묘를 구축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동굴 안에 부장하는 사례도 확인된다. 흥수아이가 실제 구석기시대 사람이라면 동굴무덤은 구석기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장법은 시신을 바르게 눕히는 신전장과 굽혀 안치하는 굴신장, 그리고 시신을 다른 곳에 안치한 뒤 시간이 지나 뼈만 남으면 그것을 추려 매장하는 세골장 등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부부 합장이나 가족 집장도 있었고, 화장의 흔적도 발견된 바 있다.
한국 신석기시대 분묘 중에서 가장 많은 사례를 보이는 것은 신전장 토광묘이다. 토광묘는 단독장이 일반적이지만 간혹 남녀 합장이나 3인 이상의 집장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분묘가 집단적으로 배치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규모는 십수 기에서 수십 기까지 다양하다. 공동묘지의 존재는 신석기시대 인간집단이 별도의 매장공간을 마련하기도 했음을 시사한다. 가덕도 장항유적의 공동묘지에서는 굴신장이 주로 확인되어 이를 가덕도식 굴장이라 한다. 옹관묘는 부산 동삼동패총과 진주 상촌리유적에서 확인되었는데, 상촌리유적 옹관묘의 경우 옹관 내부에서 화장한 흔적이 선명한 인골이 확인되어 신석기시대 한반도에서도 화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울진 후포리유적에서는 얕고 넓은 토광을 판 후 40여 구의 시신을 집장한 분묘가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한 집단의 시신을 세골하여 한 곳에 모아 매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 특징적인 것은 분묘 위에 긴 마제석부 130여 점을 부장했다는 점인데, 시신 아래에 깔아 시상을 만들거나 시신 위를 덮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춘천 교동유적에서는 동굴 바닥을 굴착하여 세 사람을 매장하였는데, 아마 고인이 생활하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분묘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적석유구가 부산 동삼동패총과 금곡동패총, 김해 예안리유적 등에서 발견되었지만 분묘로서 확정할만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분묘에서 출토하는 부장품은 대개 골각제 장신구들이며, 이외 토기·석기·옥기 등이 동반되기도 한다. 특히 통영 산등패총과 안도패총, 부산 장항유적 등에서 조가비팔찌를 겹겹이 착용한 인골이 출토하여 주목된다. 이 팔찌는 조가비를 고리모양으로 가공하여 팔에 끼우는데, 이러한 사례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이 시기에 개인에게 부여된 선천적이고 귀속적인 직역이나 지위가 존재했을 수 있다. 시신에 착장한 것이나 분묘에 봉헌용으로 부장한 것 외에 어떠한 매장의례를 위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도 있다. 잘 만든 석기를 봉헌한 사례는 앞서 언급한 울진 후포리유적을 꼽을 수 있다.
가덕도에 있는 장항유적의 묘역에서는 인골을 토기편으로 덮거나 토기편을 깔아 시상을 만든 경우가 확인되며, 일부는 토기 대신 할석이나 조가비로 시신을 덮었다. 앞서 언급한 울진 후포리유적의 사례도 특기할 만하다. 부산 장항유적 1호 인골은 위 사례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데, 조가비팔찌를 양 팔에 착장한 시신 위로 착장하지 않는 조가비장신구를 일렬로 덮은 모습이 확인되었다. 조가비장신구 착장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부산 장항유적 6호 인골이다. 이 인골은 전형적인 가덕도식 굴신장으로 매장되어 있었으며, 강제로 굴신되기 이전에 조가비장신구가 착장된 상태였다. 장신구는 팔찌와 목걸이가 있는데 팔찌는 왼팔에 5점, 오른팔에 3점이 착장되어 있으며 목걸이는 조가비고리 24점을 엮어 가슴 부분에 둘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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