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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지기 Jul 18. 2022

어머님의 보석상자

그리움을 가득담아 보내는 편지

어머님. 지금 계신 그곳은 덥지 않으신가요?


  요즘 이곳은 폭염과 높은 습도로 최고의 불쾌지수를 유지하고 있어요. 이런 날이면 어머님이 해주시던 시원한 군산식 식혜가 떠오릅니다. 미리 배워둘걸 그랬어요. 하긴 어디 그런 요리가 한둘인가요.


  저희는 몇 년 전에 서울의 직장을 정리하고 내려왔어요. 어머님이 계셨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아마도 그랬다면 은이와 영이가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든가, 할머니가 우리와 같이 서울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저는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있었을 테고, 아이들은 할머니의 그늘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 있을까요? 

  비록 다 정리하고 내려왔지만 후회는 없어요. 회사도 다닐 만큼 다녀봤고, 무엇보다 어머님이 제일 사랑하는 큰아들이 오랜 주말부부 생활에 지쳤대요. 그래도 아이들이 서울에 비해 많은 것이 부족한 낯선 도시에서 자라는 것을 아마 걱정하고 계시겠죠. 아버님도 그러셨거든요. 그런데 걱정 마세요. 전요, 어머님이 생전에 '너네 애들은 책임지고 키워주겠다'라고 하신 말씀, 철석같이 믿고 있거든요. 어디에 계시든지 그러실 거라고요. 그 믿음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졌나 봐요. 태어나서 할머니에게 서너 번 안겨봤던 은이는 마치 기억 속에 할머니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고요, 영이는 그런 언니가 혹은 할머니와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운지 그렇게 할머니를 찾네요. 그러면서도 위험한 일을 겪거나 운 좋은 일이 생기면 할머니 덕분이라고 이야기해요.


  혹시 어머님이 남기신 액세서리들 기억나세요? 제가 다 가지고 왔어요. 아버님은 어머님의 물건이 죽은 자의 물건이라 재수 없다고 취급받아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계속 써주길 원하셨어요. 어머님의 옷들도 원하시는 분들께 다 나눠드렸어요. 어머님이 항상 지니고 다니셨던 선글라스와 안경은 아버님의 책장에 놓여 있고, 쓰시던 보석함은 우리집 책장 한 칸을 차지했어요.

어머님의 보석상자  - 골방지기


  사실 보석함이라기엔 민망한 재활용한 도시락통과 소품함, 작은 정리함이지만 안에 여러 액세서리가 들었으니 보석함은 맞죠. 처음에 아이들이 책장에서 보석함을 찾았을 때 둘 다 보물 찾기에 성공한 것처럼 신나 했어요. 그런데 은이는 금세 시들해졌고 영이는 그것이 할머니의 물건들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문득문득 할머니가 생각나면 하나씩 꺼내와요.


"엄마, 이거 내가 해도 돼?"

"할머니 물건은 왜 이렇게 이쁘지?"


할머니의 반지 - 골방지기


영이는 통 안에 있는 커다란 보석들을 좋아해요. 호박이나 옥 같은 것들 말이에요. 손가락에 껴보기도 하고, 귀걸이를 귀에 끼워보기도 하면서 뜬금없이 묻기도 해요.


"할머니는 어떤 분이야? 난 할머니가 너무 그리워."


그립다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영이는 아는 걸까요? 저도 어머님이 그리워요.


제가 학부 졸업하고 큰아들이 석사 학위를 받는 날, 멀리서 어머님을 처음 뵈었어요. 아직 부모님들께 인사하지 않고 연애 중이었죠. 그날도 몰래몰래 부모님을 보았어요. 사실 아버님은 별로 기억이 안 나지만, 어머님은 '참 고우신 분이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단정하게 정리한 짧은 머리에 갈색 코트를 입으시고 왼쪽 가슴엔 반짝거리는 예쁜 브로치를 하셨죠.


보석함이 우리 집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님처럼 옷에 브로치를 달고 긴 진주 목걸이도 걸어볼까 하면서 슬쩍 꾸며보았답니다. 그러나 맨날 후드티와 청바지만 입고 다니던 저에게는 그 모습이 낯설어서, 결국은 가끔 보기만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제대로 관리도 하지 않아서 반짝임이 바래진 목걸이들도 있고, 도금이 벗겨진 장신구들도 있지요. 비싸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장신구들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썩히는 것보다 반갑게 사용해 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맞을까? 고민도 해봤지만 영이가 아직은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 열어서 하나씩 꺼내보네요. 아마도 시골집 벽에 걸려있는 사진 속 어머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장신구들을 만져보는 게 아닐까 싶어요.


어제 긴 원피스를 입고 영이를 데리러 갔어요. 이제 키가 제법 큰 영이가 제 옷깃을 만지면서 말했어요.


“할머니처럼 여기 목걸이나 브로치 같은 거 하면 우리 엄마는 더 아름다울 거야.”


웃으면서 넘겼지만, 영이가 생각하는 중년의 모습은 사진 속 어머님의 모습이 표준인가 봅니다. 아무래도 올해 가을에는 옷깃에 어머님의 브로치를 한번 꽂아봐야겠어요. 생각난 김에 오늘은 보석함을 열고 무관심에 빛바랜 것들을 닦아야겠습니다. 그리움 듬뿍 발라서요.


타이틀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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