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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지기 May 28. 2022

차곡차곡

우리의 시간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2017년, 첫째 은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은이가 설렌 만큼 나도 첫 초등학교 학부모 생활이 기대되고 설레면서도 겁이 났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분당과 서울 강남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직장 동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받은 가르침은 전업 엄마들과 친해놔야 왕따를 당하지 않고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학부모들의 기싸움이 심하고, 무시받지 않기 위해서 반모임 같은 학부모 모임에는 무조건 꾸미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맘이 된 시점에서 초등학교 학부모가 되어보니 육아 선배들이 해준 말이 생각나면서 무서운 엄마들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 덜컥 겁부터 났다.

'난 멘털도 약하고, 말도 잘 못하고 썰렁하고, 잘 꾸미지도 못하는데...'


 여중, 여고를 나왔지만 친구가 많지 않았고, 오히려 남자들이 훨씬 많은 대학과 회사에서 20년을 보내다 보니 여자들 그룹 속에서의 대화법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마흔이 되어서야 여자와 아이들만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선택적인 관계였지만 아이가 친구 없이 학교를 다니고 문제가 생겨도 어디 기댈 구속도 없다는 직장 선배의 지난 조언 때문에 다른 선택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서 안내장을 받았다. 학부모 봉사 동아리 모집에 관한 소식이었다. 그림책 읽어주기 봉사, 놀이봉사, 영어 그림책 읽기 봉사, 사서 봉사 등 몇 가지 봉사활동이 있었다. 어느 하나 자신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들 앞에 서서 봉사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또 1학년 때는 내 아이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학부모 모임에 참여해야 한다는 육아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그림책 읽어주기 봉사활동에 체크를 했다.


 교실에 들어가서 그림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은 학교 도서관과 몇몇 학부모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모아진 봉사자는 동아리로 결성되었고 봉사하면서 한 학기 동안 그림책에 대한 강의를 듣기로 했다. 동아리 이름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 <왜요?(린제이 캠프 글, 토니 로스 그림)>의 제목을 따서 '왜요'라고 지었다.

왜요? (린제이 캠프 글, 토니 로스 그림)

 처음 2년간은 1, 2학년을 대상으로 그림책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하였다. 강사를 모시고 그림책을 배우기도 하고 우리끼리 나누기도 하면서 역량도 키워나갔다. 1년 단위로 새로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고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남아 있는 사람이 더 많았고 봉사인원은 조금씩 늘어났다. '왜요'도 3년 차가 되면서 3학년까지 봉사활동을 확대하기로 하였다. 동아리 회원수도 23명이 넘었다. 일부는 그림책에서 어린이 문학으로 영역을 확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책에 대한 애정은 깊어지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관계는 동지애로 끈끈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닥쳤다. 모든 대면활동이 금지되었다. 당연히 교실에 학부모가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휴가를 얻었다 생각했다. 외부 활동 없이 가족들끼리 온전히 1년을 보냈다. 온라인 수업이 계속되니 학교의 학부모 동아리들도 하나둘씩 사라졌다.


 코로나 2년 차가 되었을 때 '왜요'도 결단을 해야 했다. 동아리 문을 닫는 대신, 교실에는 못 들어가더라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부담되었지만 그림책 읽어주는 영상을 찍어 편집해서 교실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근근이 활동을 이어오면서 우리 모두 지쳐가고 있었다.

 그림책 동아리가 몇 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받는 위로와 격려였고, 교실에서 읽어줄 때 아이들로부터 받는 생명의 에너지였다. 그런데 대면이 금지된 상황에서 영상만을 위해서 숙제처럼 모임을 하다 보니 위로도 부족했고 에너지는 점점 닳아갔다.

 그리고 올해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조금씩 일상으로 회복되면서 비록 교실로는 아직 못 들어가더라도 학교에서 우리의 공간을 얻어서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만나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봉사자들이 모여서 첫 모임을 하고 6년째를 맞이했다. 그사이 서로 간의 불편함의 거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동료로서 같은 어려움을 겪고 해결하고 기뻐하면서 차곡차곡 '왜요'만의 시간을 쌓고 있다. 순간순간 같이 그림책을 보며 나누었던 이야기의 감동, 웃음, 눈물도 그동안 같이 읽은 수많은 가치 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엄마들과의 모임이 걱정스럽고 여자들의 수다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던 나에게 '왜요'는, 6년의 시간이 쌓이는 동안 나를 둘러싼 뾰족한 울타리를 줄여주었고, 만나서 수다 떠는 일이 즐거운 관계를 선물해주었다.


 올해 활동이 재개되면서 신입회원이 들어왔다. 어느새 저학년의 엄마들과 나이 차이가 제법 나고 있었다. 그만큼 나도 나이 들었구나 생각하면서 첫 만남을 가진 날, 그림책 <차곡차곡(서선정 글, 그림)>과 <나무의 시간(이혜란 글, 그림)>을 읽어주었다. 봄부터 차곡차곡 흐르는 계절과 함께 흘러가고 쌓이는 일상들, 그리고 약하고 볼품없는 나뭇가지가 겨울을 지낸 땅에 뿌리내리고 한 계절 한 계절을 보내면서 자라고 굵어져 천년의 나무가 되는 이야기와 그림을 보면서 우리 동아리가 쌓아온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책을 읽어주면서 코로나라는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버텨내고 견뎌내고 있는 '왜요'가 새로운 회원들과 더 굵어지고 더 단단해지길 바랬다. 신입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지만 우리끼리 나누는 그림책은 더 아름답고 깊다는 것도 느꼈으면 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새 '왜요'는 천년의 나무처럼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좌) 차곡차곡 (서선정 글/그림), (우) 나무의 시간 (이혜란 글/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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