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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지기 Jun 07. 2022

관광객 말고 순례자!

<순례 주택(유은실)>을 읽고 

  대학교 2학년 때 기숙사를 나와서 월세방을 구했다. 학교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30평대 아파트의 방한칸이었다. 어린 딸아이를 가진 젊은 부부가 주인이었다.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살았다. 밤에 잠만 자고 나오니 별로 불편한 것은 없었다.


  그 뒤로도 한참을 월세를 살았다. 부모님이 가난해서 전셋집을 얻어줄 목돈도 없었지만, 인문계고등학교를 선택해서 대학을 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엄마는 '대학은 스스로 벌어서 다녀야 한다'라고 주입시켰다. 3명의 여동생은 선택의 순간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부모님은 선언하신 대로 고등학교 학비와 유일하게 대학에 간 나의 첫 등록금과 입학금만 지원해주셨다. 그러니 스스로 먹고살 수밖에 없었다. 내 학비는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충당했고 전세는 꿈도 꾸지 못했다. 가끔 돈이 떨어지거나 등록금이 모자라면 엄마에게 차용증을 쓰고 돈을 빌렸다. 그렇게 20대 초반을 보내고 직장에 들어갔다.


  직장에 들어가서 보니 투자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주식도 하고 대출받은 돈으로 아파트 분양권을 사서 2~3천만 원의 p를 붙여서 팔고는 '돈은 이렇게 버는 거야'라고 연설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서야 난 겨우 적금에 가입했는데 말이다. 내 남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본가는 넉넉했지만 괜한 자존심이 있었다. 모아둔 돈도 없었지만 부모님께 결혼할 때 '전셋집 얻어주세요'라고 말하거나 부모님이 '집을 얻어줄까?' 물어보셨을 때 '그럼요. 그러셔야죠.'라고 말할 뻔뻔함도 없었다. 내가 벌어서 내 밥벌이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자존심에 반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월세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큰 아파트 옆의 빌라촌이었다. 3층짜리 빌라의 꼭대기층이었는데 안방 1개와 거실 겸 부엌 1, 거실과 연결된 작은 공간 하나가 전부였고, 대부분 서울에 출퇴근하는 젊은 독신자들이 머무르는 동네였다.


  담장 하나를 두고 옆에는 탄천을 낀 20층짜리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주말이나 저녁이면 아파트 마당에는 아이들과 같이 나온 가족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고 우리 부부는 탄천에서 산책하기 위해 그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갔다. 그런데 괜히 그 길을 지날 때면 주민들의 눈치가 보이고, 해서는 안될 짓을 하는 듯한 불편함이 있었다. 그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자격지심(自激之心)이었을까.

  그때 처음 상실감에 빠졌다. 같이 회사 다니는 친구는 부모님이 전세를 얻어주신 분당 30평대 아파트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 우리는 15평 빌라에서 월세로 시작했다는 것도 비교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난 내손으로 벌어먹을 수 있는 자존감 강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가난하고 가진 것 없이 자존심만 세고, 경제관념도 없어서 돈을 쓸 줄만 알지 모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얼른 돈 모아서 아파트 전세를 얻고, 집을 사야겠다 꿈꾸기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지방으로 이사 오기로 결정하면서 다행인 것은 신도시 내에는 아파트 밖에 없고, 대부분 전세보증금이 싼 편이었다는 것이다. 이사 갈 집을 고르기 위해 우선 지도를 폈다. 그리고 몇 가지 질문을 던져가면서 동네를 찾기 시작했다.


'상가는 너무 가깝지 않고...(너무 싼 티 나는 번잡함은 싫어!)'

'초품아, 중품아, 좋다면 고품아까지!'

'주위에 임대 아파트는 없어야지?'

'다 비슷비슷한 형편의 사람들이 사는 동네일까?(비슷한 평수가 몰려있을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나도 참 속물 같았다. 평수가 비슷하면 사는 형편과 사고의 수준이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도 우습고, 무슨 비싼 주택가도 아닌데 번잡한 상가와 약간 거리 있는 곳은 왜 찾았는지...... 한심하다. 거기다가 임대아파트에 대한 선입견은 아직까지도 남아있었다.


'난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 그런데 살아도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알지만, 단지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것뿐이야.'

이 무슨 개소리인가. 근데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 부끄럽게.




 <순례 주택(유은실)>의 순례 씨는 때 밀어 번 돈으로 마당 넓은 집을 샀고 도로가 들어오자 마당 일부와 바꾼 보상금으로 원래의 집 대신 지금의 4층짜리 순례 주택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스스로 밥 벌어먹고 살면서 이웃들과 둥게 둥게 어울려 사는 여러 사람들이 있다. 할머니 순례 씨는 통장 잔액이 999만 9999원보다 크면 불안하고 공짜로 무엇인가를 받는 게 싫다. 착하고 예의 바르게 살라는 순례(順禮)가 싫어서 순례자의 순례(巡禮)로 개명했다. 갓난쟁이 때 자신의 품으로 들어온 수림이를 품어주고 키워주었다.

순례 주택이 있는 거북마을 옆에는 40층짜리 원더랜드 아파트가 있고 그곳에는 스스로 밥벌이를 해본 적 없는 수림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수림의 엄마는 스스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지만 거북마을 빌라촌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차별하면서 코를 치켜들고 다녔다. 오수림의 아빠는 고학력자에 교수라는 겉이 번지르한 직업만 꿈꾸면서 장인어른과 4명의 누나들이 주는 돈으로 살고 있었다. 밉상에다 진상이던 수림이네 가족이 쫄딱 망해서 순례 씨의 은혜로 순례 주택에 들어와서 살게 되는 이야기가 책의 전체적인 내용이다.

<순례 주택, 유은실>



"솔직히 말해서, 빌라촌 아이들이 관리가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이잖아요. 부모 입장에서 솔직히 말해서, 빌라촌 애들과 어울리는 게 걱정이 됩니다. "

 <순례 주택 p28, 수림 엄마의 인터뷰>


  책을 읽으면서 나도, 남편도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어른이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부끄러워졌다. 수림 엄마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내가 어떤 말로 포장해도 딱 수림 엄마의 말이 내가 그간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우리 집도 가난했고 나도 가난하게 자랐으면서 몇몇 겉으로 보이는 조건으로 애들이 관리도 안되고 그런 애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가족들끼리 우아하게 '감사하는 삶'을 살자고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옆사람과 비교하면서 내가 더 부족하지는 않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그런 세속적인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 

<순례 주택> 중 순례 씨


  순례 씨의 말처럼 수림이는 인생의 관광객이 아니라 순례자이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적어도 내 밥벌이를 하고 남에게 폐를 안 끼치고 사는 것만으로도 장하다고, 어른답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어른 '순례 씨'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과연 얼마나 '진짜 감사'를 하면서 살았던가.'


  더 좋고 멋진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싶었다. 계속 좀 더 행복해지고 넉넉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그러면서도 난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다는 위선을 떨었다. 순례 씨처럼 남는 것을 나누지는 않고, 잃는 것이 없게 해 달라는 나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감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순례자는 현재 내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겪고 있는 불편과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신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결국 나는 아직 관광객이다. 이것저것 요구하고, 더 나은 대우를 받길 원한다. 최소한 잃은 것은 없어야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하고 있다. 유쾌한 책을 읽고 무거운 생각에 빠졌다. 언젠가는 나도 내 인생의 관광객이 아니라 순례 씨 같은 순례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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