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길의 어느 아담한 카페 앞에서 내가 분주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카페 주인인 건지, 카페 간판부터 카페 외관까지 신경을 쓰며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연구실 직원이었던 김연구원이 나타났다.
"어, 김연구원이 여기서 왜 나와?"
"누구 기다리세요?"
"아, 나 센터장님. 김연구원도 오기로 했었나?"
"저는 들어가서 기다려도 될까요?"
"어... 뭐, 그러든가."
김연구원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그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언덕길이 어두컴컴해지면서 사람 하나 다니지 않을 것 같은 골목길로 변했고, 덩그러니 켜진 가로등 불빛 하나만 의지한 채 나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왜 안 오시지? 근데, 김연구원은 여기 어떻게 알고 왔지?'
김연구원의 등장이 달갑진 않았지만 그녀와 만난다는 설렘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카페인지 식당인지 모를 그곳에서 나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 옆에는 덩치가 제법 큰 남자가 있었고,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그 남자가 그녀의 남편인지, 아님 다른 낯선 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한달음에 내려가 그녀를 덥석 안았다.
"언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녀의 3주기가 다 되어가던 어느 날, 그녀가 꿈에 처음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 꿈에는 그렇게나 자주 나타났다던데, 내게는 한 번을 와주지 않더니 그때 처음 그녀를 꿈에서 봤다. 꿈속에서 울던 것이 현실까지 이어져 울면서 잠에서 깬 것 같았다.
그리고 그해 처음으로 혼자 산소를 찾아갔다.
매번 누군가를 대동하고 산소를 방문했는데, 그 꿈을 꾸고 난 후 용기를 내 혼자 그녀를 찾아갔다.
아무리 공동 관리하는 곳이긴 하지만, 매번 색이 바래진 조화를 보는 건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좋아했던 바닐라라떼와 소주를 한병 가지고 가서 꿈에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나한테 이럼 안 되는 거였어요, 알죠? ... 꿈에 나타나 미안하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나도 미안해요."
그날 이후, 나는 그녀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났던 것 같다.
완전히 잊진 못했지만, 마음에 콱 박혀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더니, 그녀 이야길 해도 그리운 감정만 생길뿐 더 이상 감정이 요동치지는 않았다.
며칠 뒤면 그녀의 5주기다.
여전히 그녀의 사인은 여러 사람들 뇌리에 "자살"로 남겨져 있고, 나는 그렇게 믿지 않지만 진실은 궁금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나는 그녀를 그런 가십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분명 그녀의 능력을 시기질투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그녀를 적으로 간주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내 주변엔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녀의 겉모습과 속마음이 달랐다 하더라도, 내겐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그저 내게 "그녀"일 뿐이다.
내가 본 그녀는 활기찼고, 열정적이었고,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단단해 보이고 냉철한 사람이었지만, 거절을 잘 못하는 여린 사람이기도 했다.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함을 늘 마음 아파했지만,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엄마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림을 사랑하는 꿈 많은 소녀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그녀는 멋졌다.
이 글을 그녀의 5주기에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