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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를 끝낸 뒤

by My Way

처음에는 그녀의 죽음을 추모할 시간조차 없었다.

센터가 겨우 안정기에 들었는데, 해보고 싶어 하던 일을 준비만 하다 간 그녀가 너무 안쓰러우면서도, 그녀가 남겨놓은 일들을 해내야 하는 바쁜 상황이라 계속 슬퍼만 할 수가 없었다.


새 센터장이 부임하고 나서 얼마 뒤 코로나가 조금 잦아들면서 센터가 정상화되었고, 나는 그녀가 남겨놓은 숙제를 슬슬 진행시켜 나갔다. 그런데, 그즈음부터 내게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언니를 본 마지막 날, 산책을 가자고 했을 때, 갔어야 했어. 그랬다면, 언니의 마음을 좀 들여다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이상한 그림을 보여주면서, 나한테 시그널을 보낸 거였는데, 그걸 내가 캐치를 못한 거 아닐까?'

'월요일에 연락 안 됐을 때라도 사무실에 연락해봤어야 했어. 사무실에서 몰랐다 하더라도, 내 연락으로 좀 더 일찍 언니의 상황을 인지했더라면 장례식에라도 가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안일했어.'

'근데, 너무 한 거 아냐?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않나? 나 꼬셔서 여기 데려 왔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이걸 전부 나한테 떠넘기고 가버리면 난 어떡하라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러게 일 좀 줄이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시간 좀 보내라니까. 앞으로 재미나게 살 생각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차로 출퇴근하는 20여 분 동안, 화가 났다가, 안쓰러웠다가, 미안했다가, 후회가 되었다가, 정말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이는 날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운전하기가 싫고, 출퇴근하는 그 길이 너무 힘이 들었다. 가슴도 콩닥거렸고, 울컥하는 감정이 생겼다가, 멍해졌다가, 화가 났다가, 하는 것이 갱년기가 벌써 왔나 싶을 만큼 감정들이 용솟음쳤다.

출근을 하고 나면 할 일이 태산이라 잠시 잊었지만, 다시 운전을 해서 퇴근을 해야 하는 그 시간만큼은 나도 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녀가 내게 남겨놓은 숙제들을 끝내고 나서, 나는 미련 없이 센터를 떠났다.

혹자는 새 센터장과의 불화 때문에 내가 센터를 그만둔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센터를 오가는 출퇴근 길이 너무 힘들었고 그녀와의 추억이 너무 많은 센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내가 센터를 떠난 더 큰 이유였다.


센터를 관두고 난 후, 그제야 그녀가 있는 곳에 다녀올 용기가 생겼다.

하지만 혼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센터 일을 하면서 뒤늦게 다시 연락이 닿아 친하게 지내고 있던 동갑내기 연구실 선배를 불렀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던가?

연구실 선배와 그녀에 대한 이야길 하면서 산소를 다녀왔는데, 생각보다 덤덤했다.

그녀의 산소에 조화를 꽂고, 그녀의 이름과 생년월일, 사망일 등이 적힌 비석을 보면서도 참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죽음 이후 내가 느낀 후회와 반성, 미안함, 죄책감에 대해 털어놓았고, 그 선배도 그녀와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연구실 선배도 그녀의 사인을 "자살"로 믿는 듯했다.


"OO선배는, O박을 제일 신뢰했던 것 같아요."

"읭???"

"알잖아요. 얼마나 냉철한 사람인지. 그런 사람이 O박을 계속 아르바이트할 수 있게 돕고 결국엔 센터에 입성시켰다? 그건 이미 O박이 OO선배 맘에 쏙 들었다는 증거예요."

"그런가요?"

"내가 아는 OO선배는 웬만해서는 자기 얘기 안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처리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늘 바빴거든요. 그런데, 보고서 마무리도 O박에게 시켰다면서요? 이미 그럼 게임 끝인 거지.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요. 아마 OO 선배가 가장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O박일 거예요."




과연 그랬던 걸까?

그래서 나 믿고 그렇게 먼저 가버린 걸까?

그렇다면, 이 또한 내 잘못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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