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황망한 죽음 이후, 센터도 재정비에 들어갔다.
나는 원래 센터장과 1+1으로 센터에 입성한 터라 다른 연구원들과 계약조건도 다르고, 계약 주체도 달랐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 이후 센터를 관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센터장이 어떤 사람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와 같은 마인드로 사업을 추진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비서 겸 사무국장이라는 타이틀로 센터에 입성한 내가 필요한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내 입장이 좀 난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 주체인 지자체 주무관들은 다른 생각인 것 같았다.
센터장이 누가 되든, 돌아가신 센터장님이 계획한 것들을 실제로 실행해 줄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해줄 사람은 나뿐이라고 했다.
실제로, 센터 준비 과정에서부터 센터 운영까지 그녀와 함께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센터를 운영할 계획이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도 나뿐이었다. 1년 치 계획이 이미 다 세워지고 예산까지 다 짜여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생각을 그대로 실현해 낼 사람도 결국 나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남아 그녀가 남겨놓은 숙제를 해낼 수밖에 없었다.
새로 부임한 센터장에게 그녀의 계획을 인수인계하는 것도 내가 할 일 중 하나였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그 해 그녀가 했을 가장 큰 일은 그 사업에 인근 초등학교 아이들과 예술가를 끌어들여 동네 주민들과 협업하게 만드는 거였다는 것을 새로운 센터장이 부임하자마자 설명했다.
내 생각에, 최소한 그 두 가지만 해내도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게 내 몫을 해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새 센터장은 우리와 결이 달랐다.
그녀의 계획을 모두 못마땅해했다. 만약 예산까지 다 결정된 사안이 아니었다면, 계획 모두가 엎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대놓고 그녀의 계획을 디스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짜 놓은 계획을 실행하면서도 내내 다른 행보를 보였다.
거주하고 있는 주민보다 주민 대표를 더 신경 썼고,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보다 의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미 초등학교와 협의해 놓은 계획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급기야는 그녀가 사전에 미리 섭외해 둔 예술가들과 의견충돌을 일으켜 실행을 앞둔 계획들을 뒤집어 놓았다.
안 그래도 코로나로 인해 모든 계획들이 순연되어 있던 상황이라 바쁜데, 섭외되어 있던 예술가들마저 사퇴해 버리자 모든 계획들이 꼬여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를 사랑했던 많은 분들이 그녀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잘 끝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셔서 훼방꾼(?) 새 센터장과는 별개로 그해 계획되어 있던 큰 프로젝트 두 가지, 인근초등학교와의 협업, 예술가들과 주민들과의 협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그다음 해의 계획도 알고 있었으나, 연말에 새롭게 계획을 짜면서 보니 그녀의 계획을 실행시키려면 사사건건 새 센터장과 논쟁을 벌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한발 뒤로 물러나 센터를 떠나기로 했다.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면서도, 내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그녀가 떠난 후 약 8개월간, 그녀의 빈자리를 지키면서, 그녀가 그해 하고 싶어 했던 일들을 해내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를 곁에서 지켜본 이들은 나의 퇴사를 축하해주기까지 했다.
그 후, 센터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함께 일했던 주무관들도 부서 이동이 되었는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니, 연락해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해 그녀와 함께 일했던 모든 이들이 내게는 그녀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도화선이라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 같다.
그녀의 죽음 이후, 제대로 된 상실의 시간을 겪지 못했던 나는 그녀가 남겨놓은 숙제를 하는 내내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슬픔이 계속 차곡차곡 쌓였던 것 같다.
센터를 벗어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저 그런 일상을 보내다가도 문득문득 그녀의 "죽음"이 내 앞을 막아서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