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가 된지 2년이 되었습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건 스물여섯 살 때였다. 엄마가 암에 걸렸다.
가고 싶은 대학에 갔었고, 하고 싶은 공부를 했었다. 가고 싶은 나라로 여행을 갔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고, 하고 싶은 활동을 했다. 일주일 계획, 한 달 계획, 1년 계획, 5년 계획, 더 나아가 10년, 20년, 30년 계획을 세웠다. 계획대로 완벽하게 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힘든 일도, 어려움도 분명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노력한다면, 적어도 나는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암에 걸린 엄마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예약하면서,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뉴욕의 회사에 출근해 나의 상사에게 퇴사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나의 믿음이 연기처럼 사라져 가는 걸 온 영혼으로 느꼈다. 내 인생은 내가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스물여섯 살의 겨울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한국에서 처음 찾은 곳은 서울대병원 암병동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복도와 통로를 걸어갔다. 하얗고 조용했지만, 평화롭진 않았다. 그 어떤 안타까움도 지니지 않은 눈동자들이 곳곳에 있었다. 웃는 사람도 있었고 우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감정들은 그저 허공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누구도 그 감정을 간직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잠시 잠깐, 스치듯 웃었고, 지나가듯 울었다.
엄마는 거기에 있었다. 인생은 아름답지 않았다. 인생은 처절했다.
그 하얗고 조용한 곳에서 먹고 잤다. 어떻게 잤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곳의 사람들을 만났고 말을 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3시간 이상을 한 번에 쭉 잠들지 못했다. 잘 수 있을 때 30분~1시간 정도 잤다. 밤이든 낮이든. 잠깐 잠이 들었다 싶으면 화들짝 깨서 엄마를 보았다. 지금이 아침인지 밤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숨을 쉬고 있었다.
삶을 생각하기보다는 죽음을 생각하는 날들이었다. '살아있어서 감사하다'는 말보다는 '아직 죽지 않아 다행이다'는 말이 더 적확한 날들이었다.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우리에겐 오늘뿐이었다.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면 또 '오늘'이 되었다. '오늘'은 늘 간신히 '오늘'이었다. 그 '오늘'은 몇 달 동안 이어졌다.
이런 '오늘'을 살아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오늘'이었다. '오늘'이 되면 '오늘'이 되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벅찬 행복과 감격의 '오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오늘'에 감사해야 했다.
인생은 아름답지 않았다. 처절했다.
이 인생 속에서 우리는 감사하자고 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감사했다. 엄마는 엄마가 죽고 나면 앞으로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게 걱정이라고 했다. 엄마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너무나 좋겠지만, 그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면 내가 고생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봐 그게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아등바등 살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건강하게 열심히 즐겁게 살되, 가끔 너무 힘들면 하늘을 올려다보고 엄마가 있는 하늘나라를 생각하라고 했다. 엄마가 그곳에 있다고. 조금만 더 이 인생을 버티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편히 살 수 있다고.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늘나라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거였으면 어쩔 뻔했냐고.
우리는 여기에서 '소망(所望)'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래, 소망이라고.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이게 끝이 아니라고.
소망이라는 말이 주는 울컥함이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되었다. 웅크려서 끄적거리기만 하던 내가 이렇게 세상에 나와 내 글을 드러낸 지 2년이 된 것이다.
지난 2년간 내 글을 본 분들이 참 많은 피드백을 주셨다. 나는 몸이 배배 꼬였다. 정성스럽게 댓글을 남겨주시거나, 적극적으로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나는 그 화면을 띄워놓고 한참 동안 줄줄 울었다. 내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다시 한번 힘내 보겠다고 하는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내가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참 많은 피드백이 있었지만, 이 모든 피드백을 하나로 묶는, 그러니까 내가 정말 평생 글을 써야 하는구나 하고 느끼게 해 준 피드백은 이 문장이었다. "작가님의 글이 소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을 살 수 있게 하는 힘. 힘든 오늘이지만, 그래도 일어나 나갈 수 있게 하는 힘.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하는 힘. 나는 그게 소망이라고 믿는다.
소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오늘을 살아갈 힘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큰 힘이 어디 있을까. 이 처절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간절한 게 뭐가 있을까.
그런데,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글이라니. 내 글이 소망을 불러일으킨다니.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모든 일을 그만두고 '쉼'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그 어떤 일도 하려고 하지 않았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브런치는 나의 모든 것이 되었다. 나는 한 문장 한 문장 글을 쓰며 내 삶을 정돈했다. 일주일에 글 하나를 쓰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보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미래도 꿈꾸지 않았었는데. 소망이었다. 내 안에 작은 소망이 자라기 시작했다. 일어나 나가고 싶다는 소망. '오늘'을 살고 싶다는 소망.
나는 소망을 품고 글을 썼고 사람들은 내 글을 보았다.
나는 그저 내 소망으로 글을 끄적거렸는데, 내 글이 소망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을 들으니, 나의 소망 또한 한번 더 불러일으켜졌다. 나는 그저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썼을 뿐인데, 어떤 분은 내 글을 보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해주셨다. 그 문장을 보고 나는 오히려 내가 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나는 세상에 나왔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카페 사장이 되어 커피를 내리고 손님을 만난다. 책을 보고 글을 쓴다. 나는 나의 소망으로 글을 쓰고 나의 오늘에 커피를 내릴 뿐인데, 내 글을 보고 소망을 갖는 사람들이 있고 내 커피를 먹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작은 소망과 미약한 오늘이 힘을 갖는 순간들이다.
오늘 아침도 카페에 나와 문을 열었다. 나는 아침의 이 공기 속에서 오늘을 소망한다. 나에게 '오늘'은 간신히 '오늘'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산다. 나는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