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하게 살자
군인 아저씨와 빨간 머리 아가씨의 솔선수범
아직 겨울이 다 물러가지 않은 3월의 어느 평일 오전 10시, 4호선 지하철은 한산했다. 나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신 할머니 옆에 자리를 잡았고, 내 목적지는 한 시간쯤 떨어진 곳이니 나는 일찌감치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이 들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눈을 떠졌다. 짐수레를 갖고 지하철에 오르신 할머니 때문이었다. 출입문턱을 넘는 소리, 앉을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소리가 주위 모든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때 내 앞에 앉은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할머니는 덥석 앉으셨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해주셨으면 좋았을걸. 20대로 보이는 그 빨간 머리 여성은 청미니스커트에 검은 스타킹, 가죽 부츠 차림이었다. 객차 안의 모든 것, 사람들의 표정까지 다 무채색인데 그녀만이 유일하게 내부의 채도를 높여주고 있었다.
몇 정거장을 더 간 후에 할머니는 목적지에 도착하셨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지하철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상태였는데, 자신과 가까운 출입문쪽으로 걸어간다는 게 지하철 이동방향과 반대로 움직이게 되면서 할머니의 몸은 휘청거렸다. 한 손에 들린 짐수레는 노인의 움직임을 한층 더디게 했다. 그때, 아까부터 계속 출입문 앞에서 아무 손잡이도 잡지 않은 채 균형을 잡고 서 있던 군인 한 명이 할머니를 제 오른팔로 부축했다. 누가 보면 손자인 줄 알 정도로 두 사람은 팔을 지그시 맞잡은 채 한 정거장 약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할머니는 곧장 쌩하고 나가셨다. 고맙다는 말은 둘째 치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청년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무엇이 할머니를 말 한마디까지 인색하게 한 걸까.
그 두 청년들은 나보다 훨씬 어려 보였는데, 그들은 나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희망을 품게 했다. 그리고 반성케 했다. 나는 사회를 위해 ‘좌절’ 말고 무엇을 했었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는 비관도 깊다. 인간의 이기성이 주류인 세상에서 '그래도 인간은 따뜻하다'를 부르짖는 '휴먼카인드(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를 접하게 된 건 내게 큰 위로였다. 저자는 책 끝에 몇 가지 조언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뉴스를 멀리 하라였다. 사람들의 눈과 귀에 걸리고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 뉴스는 '썩은 사과'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헬조선의 오명에도 나라가 이렇게 굴러가고 있는 건, 묵묵히 제 일을 해내고 타인에게 기꺼이 친절을 베푸는 국민들 덕분이다. 다수의 기자들이 제 밥벌이를 위해 올린 기사들은 그런 걸 다루지 않으므로 우리가 평소에 인식조차 못하고 살아가지만, 실제 우리 주변엔 이런 분들이 많다. 우리 집 어른들은 내가 무슨 걱정을 하면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고 말씀하셨다. 온라인과 가상세계만 전전하지 말고 거리를 직접 걸어보자. 세상 욕만 하는 사람들에 편승해서 얻을 건 분노와 피해의식밖에 없고, 밖을 거닐다 보면 이렇게 나처럼 의외의 곳에서 귀인들을 만날 수도 있다. 나도 좋은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